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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1/5

의사 전달의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한 말에서 자유롭기

난 여자든 남자든 섬세하지만 선이 굵은 사람들을 좋아한다.

선이 굵다 함은, 바람직한 어떤 방향에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사소한 작은 일에는 과정이라 여기며,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이란 넓은 울타리에 두고,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에는 어떤 관대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양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선이 굵은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쪽을 지향한다는 것 뿐이다.  

 

동성인 여자들에게 많이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지향하는 스타일을 이미 갖고 있는 사람들은

여자들보다 남자들에게 더 많이 있어서 난 남자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프로이드가 말하는 원래 본능적인 한계를 넘지 못한 자기 변명이라고 나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아주 사랑했던 친구들은 여자였고 그들과 함께 있으면,

남자들과의 대화에서 느끼는 섬세하지 못해서 오는 답답을 넘어설 수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니까.

 

 

내가 선이 가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늘 말의 한계와 구속에 스스로 매여 스스로도 힘들게 하지만 주변의 평화를 쉽게 깨기 때문이다..

약한 이들은 그 구속에서 스스로 헤어나지 못해 힘들어 하면서 작은 현실에 자꾸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미워할 수 없는 이웃들이다.

하지만 가까이 하기에도 부담스런 이웃들이기도 하다.

순간적으로 미워지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니까.

 

이기적이거나 과격한 사람들은 주변을 아주 힘들게 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쩌면, 모든 말을 기본적인 믿음과 사랑의 영향력 아래 두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랑이 기본으로 깔리지 않고 말을 의사전달 도구로만 사용되면 오해와 미움의 동기로 사용되기가 쉬웠다. 

 

그들 역시 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희생자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더 정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난 사랑의 부족으로 생각한다.

 

말꼬리 잡아, 괴롭히기 위한 말장난 따위의 수준 낮은 피곤한 행동들은, 말을 그 예리한 도구로의 특성을 나쁘게 이용하는 것으로서,

그 말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이용한 비겁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여, 개인적으로는 아주 싫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든 경우의 우리 인생길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의사전달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말에, 사랑이 근거하지 않고서는 거친 돌짝밭 길을 걷는 것처럼 서로 힘들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

 

그리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의사전달의 한 표현인 말의 한계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사랑의 법' 안에 머물 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어떤 말을 다루게 되면 말 주변에 달무리가 생기듯 빛무리가 생겨

2차원의 말이 3차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어 말의 답답한 구속력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었다.

들으면서도, 하면서도 다 마찬가지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반대급부까지 전달되는 말의 어감이라는 2차원적인 느낌을

그 사람의 상황과 그 사람이 말하는 의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듣게 되면 그 말의 골자만 전달받게 되어

말이라는 한계와 구속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이기도 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모든 구속에서 해방시키고

우리 모두가 진정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께 다가갈수록, 그분의 사랑의 빛이 우리에게 배이므로

사람의 한계와 그들의 말의 한계를 넘어 진정 자유로운 영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님 앞에 흠 없는 자녀의 모습들로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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