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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1/5

어릴 적 봄날의 회상

 이 맘 때 쯤이면 치마를 입기 시작했다.

우리 어머니는 치마을 입기 직전까지 겨울 내복을 입혀 놓으셨다.

초봄의 날씨는 믿을 수 없다고... 

 

하얀 블라우스에 하얀 타이즈를 신고 치마를 걸치면 봄 나비가 된 듯 날아갈 것 같았다. 

팔짝 팔짝 뛰면 치마가 나풀거리며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좋아 그렇게 다니면

그것을 망아지 뛰듯 뛰어 다닌다고 늘 어머니께서는 나무라셨다.  

 

치마를 입혀 놓고 간섭하는 것은 어찌나 많은지.

앉을 때 조심해서 앉아라. 

남자 애들하고 딱지치기 구슬치기 하지 마라.

흰색 옷이니 깨끗이 입어라.

조심해서 다녀라.

털갈이 하는 루비 안고 다니지 마라.

깨끗이 씻어라.

 

따스한 햇볕에 따뜻해진, 기름칠 한 듯 부드러운 바람결이 뺨에 닿이면 눈이 감겼다.

그리고 병아리처럼 깜박 깜박 잠이 왔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동네가 살아 나면서 시끌벅적해졌다.

고~ 물 삽니다. 외치는 고물상 아저씨 소리도 들리고, 고장 난 시계나 재봉틀 고칩니다~외치고 다니는

아저씨의 귀에 이미 익은 리드미컬한 소리도 들리고,

가끔씩 나를 놀래키는 굴뚝 청소 아저씨의 " 뚤어 ~"하며 징소리 내는,

이미 까만 재를 뒤집어 써 무섭게 보이는 굴뚝 아저씨의소리도 들리고,

동네 아이들 떠드는 소리, 동네 아줌마들 소란스런 말 많은 소리. 양철 대야 부딪히는 소리.

동네 개 짖는 소리. 새소리까지...

 

난 봄엔 사람들의 소리까지 따스한 햇볕에 녹아 살아 나오는 것 같았다.

봄의 소리는 늘 소란스러웠다.

 

특히나 봄날 일요일이면 부지런하신 우리 아버지 땜에 늦잠을 잘 수 없었다.

잠도 채 깨기 전인데 집에 있는 온 문과 창문을 다 활짝 열어 버리셨다.

더 버티고 자다가는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 지 모르는 상황이니 마땅히 할 일 없으면

자기 책상과 방정리를 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 가장 바람직한 행동이라는 것을 누가 딱히 가르쳐 주지 않아도 우리 삼남매는 스스로 터득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아침 식사를 하시기 전에 일을 먼저 시작하셨다.

유리창 닦고 ,창살 그리고 대문의 페인트  칠하시는 것이 시작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코드가 제일 잘 맞았다.

창살 페인트 시작 전에는 물걸레로 먼지를 싹 닦아야 하는데,

아버지가 필요한 시간에 눈치껏 새 걸레를 내미는 것도,

새로 빤 걸레의 물기 별로 없는 상태도 아버지의 마음에 꼭 들어서,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일은 걸림이 없었다.    

  

처음엔 아버지의 조수 역할을 어머니가 하셨는데,

아버지 감각에 어머니의 감각이 따라가지 못해 늘 어머니는 필요없는 잔소리와 역정을 들어야 했다.

내가 어느 정도 크고는 어머니 대신 내가 아버지 조수 역할을 맞았다.

그리고는 ...^^ 

어머니는 그 일에서 빠져 차라리 점심이나 저녁을 특별히 준비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셨다.

아버지의 잔소리와 역정이 듣기 싫은 우리 어머니는

 "네 아버지 잔소리에 내가 다 늙는다. 그 까다로운 성미를 누가 다 맞출꼬" 

그때 솔직히 난 아버지 감각에 어머니 감각이 못 따라가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 때의 부지런함이 다 없어져버렸다.

그런 것을 보면 그때의 칼칼함과 부지런함은 태생적인 것보다 아버지에게 맟춰진 것이었나 보다.  

 

집을 돌아가며 페인트를 다 칠하다 보면 오후가 훌쩍 넘었다.

그때까지 페인트 통을 들고 따라다니면서 걸레를 빨아다 드리는 나만 칭찬을 듣게 되었다.

 

식구들이 다 놀은 것은 아니었다.

물을 갈아다 주고 내가 미처 빨지 못한 걸레를 빨아 주는 것에 어머니나 동생까지 매여 있었지만

표 나는 일은 내가 아버지 옆에 늘 있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칭찬은 나만 들었다.

어쩌면 그런 작은 일에서부터 아버지의 나에 대한 편애는 가속도를 붙었는지 모른다.

 

그런 식으로 내가 한 것 이상의 칭찬을 받는 것은 오빠에게는 늘 미안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일로 아버지께 야단을 맞은 오빠는 나한테 괜시리 시비를 걸어 억울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편애에 가까운 과한 칭찬을 들을 때면 난 오빠나 동생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부산으로 이사 오고 나서,

오빠와 똑 같은 액수의 용돈을 가지고 서울에 나란히 다녀오게 되어도,

돌아와서 지출 내역을 써 오라고 어버지의 요구를 받은 것은 오빠 뿐이었다.

"지영이는 요?"

우리 아버지 말씀, "재는 필요 없는 데 돈 안 쓰니 너만 써 오면 된다."

크면서 아버지의 편애 사실이 오빠에게 가장 미안했다.

돈 쓰는 방향은 오빠나 나나 솔직히 비슷하다는 것을 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눈에 보이는 편애 사실이 오빠에게 늘 미안했고 지금까지도 미안하다.  

 

오빠와 난 어머니 아버지 그늘 아래, 같은 집에 살았어도,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누리는 깊이는 서로 달랐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사랑에 항상 나에게 밀려 있었던 오빠를 알기에 그 사실을 지금까지 확인해 본 적이 없다.  

 

그 때의 기억을 더듬을수록 기억은 도리어 더 선명해져 그때의 얼굴들이 더 그리워지지만,

그 얼굴들은 기억에 묻혀버린 얼굴들이 되어 버렸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살면서 남긴 기억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같은 시간 속에 사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행복한 많은 기억들이 남도록 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