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학과 생물 쪽을 좋아했다면 그 친구는 국어와 역사 사회 쪽을 좋아하던 아이였다.
내가 역사 쪽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모두 그 친구의 영향이었다.
난 사회 공부 할 때 항상 지리부도를 옆에 두고 있었다.
꼭 노트 정리를 했는데 그림과 함께였다.
그 그림은 지리부도에다 트랜싱페이퍼로 베껴 그 부분을 사각 틀로 만들어 여러가지 색깔의 볼펜으로 표시를 해 둬야 머리 속에 확실히 이해가 되었다.
사회 문제 하나 하나 그림과 사건의 역사적 배경, 사건의 결과를 기록하였기에 같은 시간 안에 많은 양을 할 수 없는 나는 시간과 효율적인 면에서 부족한 미련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는 달리 이 친구는 아주 현실적인 감각이 뛰어난 아이였다.
그 아이는 노트가 따로 없었다.
책이 노트고 참고서가 노트였다.
솔직히 글씨도 개발소발 같았고^^ 그림도 경계 면만 겨우 그린 듯 한 성의 없는 그림이었지만
나보다는 진도의 속도가 빨랐다.
그래서 사회 점수와 문과 쪽 과목의 성적은 그 아이가 나보다 늘 좋았다.
그 친구 집은 조금 어려웠다.
산 중턱에 있는 시민 아파트.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서야 나타나는 곳.
입구가 너무 캄캄해 들어서서 조금 있어야 복도 옆으로 각각의 집의 문들이 구별되고 공동 화장실을 통과하여 두 번 째 집이 내 친구 집이었다.
서민 아파트의 그 좁은 방엔 항상 동그란 밥상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는 늘 풀 그릇과 붓이 있었다.
친구의 집은 인쇄된 약 봉투에 풀을 칠해 주문 받은 약국으로 배달하는 일을 부업으로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정리 정돈되어 있고 각자 일을 알아서 하는 군대 같은 우리 집 분위기와는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사람냄새 나는 그 친구 집이 좋았다.
토요일 날 뭐 이런 라면이 다 있니? 하시며 짜파게티를 라면처럼 끓여 주시던 친구 어머니는 우리 엄마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푸근해서 좋았다.
너무도 좁은 부엌 연탄 아궁이에는 양쪽으로 큰솥이 걸려 있었는데 그곳엔 항상 뜨거운 물이 가득 담겨있어 친구는 수시로 그곳에서 머리를 감았다.
나는 방안에 앉아서 친구가 틀어준 음악을 들으며 그 아이의 몸 동작을 그림처럼 보곤 했었다.
그 친구 집에 가장 안 어울리는 것이 있다면 질 좋은 오디오였다.
하사관이던 친구 오빠가 군대에서 면세로 사서 보낸 오디오였고 음악을 좋아하던 친구는 소중한 보물처럼 아끼고 내가 가는 날이면 꼭 풀그릇 올려진 밥상을 저쪽 방으로 옮겨놓곤 작은 방엔 아무도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처음엔 통로도 어둡고 너무도 좁은 잡. 화장실도 불편해 낯설었지만 두 번 세 번 가면서 좁았던 공간이 조금씩 좁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대학 시험을 보고 우리 엄마의 미움을 엄청 받고 있을 적에 마땅히 갈곳 없어
그 친구 집에 자주 들렀다.
내가 다른 친구들 만나는 것을 시샘 내지 않고 도리어 "너는 네 손으로 돈을 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잖니?" 하면서 자기 용돈 내 주머니에 찔러주는 친구였다.
한번 씩 집에 돌아오려 하면 내 외투가 없곤 했었다.
친구 표현으로 "바람난 우리 언니 또 네 옷을 입고 나갔나 보다. 나 정말 미치겠다"하며
자기 외투를 미안하게 건네주던 친구, 그 시절이 오늘 난 그립다.
공부도 곧잘 해 좋은 학교에 합격했던 친구였으나 대학을 포기하고
때늦게 공부하여 친구와 같이 대학시험을 보아 합격한 오빠를 밀어주던 착한 친구였다.
여고를 졸업하던 그해 허름한 다 쓰러져 가는 헌 집을 빌려 인쇄기를 들이고
약 봉투를 인쇄하여 집에서 봉투를 붙이고 하여 오빠 대학 보내는 일에 손을 걷어 붙였다.
그 오빠가 결국엔 매일 술에 절어 계셔 엉망이던 집을 일으켜 세웠다.
그 오빠는 늘 반듯했었다. 아버지로 인해 흐트러진 동생들이 있을 까 노심초사하며
동생들에게 엄격하게 매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오빠, 대학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여 아파트 하나 마련하고 자기 생활에 걸림돌이 될 것 같은 동생 세 명을 다 결혼시키고 나서 나를 찾아 부산에 내려왔었다.
자신이 결혼을 생각하기 전 꼭 거쳐야 할 일이라 생각했기에 그냥 기대하는 마음 없이 내려왔다 했었고.
난 진짜 미안한 마음으로 그 오빠를 배웅했다.
지금은 대기업 중견으로 탄탄한 생활기반을 잡아 잘 살고 있다한다.
애 먹이던 친구 언니 그리고 손아래 여동생까지 잘 살고 있으니 지금 이야기는 친구 집에서도 아주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난 내 친구가 일을 하던 마포의 허름한 집을 간혹 찾곤 했다.
더운 여름,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 시끄러운 라디오 음악소리, 중국집 음식 그릇, 콜라가 어우러져 있고 마당 앞 수돗가에는 쥐들이 물어간다고 세수 비누를 천장에 줄로 매달아 놓고 있었다.
신기한 모습이기도 하였으나 나도 곧 익숙해져 손을 씻으려면 허공에 매여있는 비누를 잡아 사용했다.
" 야.. 이거 적응이 안 된다" 하면서 매번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내 친구의 꾀에 탄복을 했다.
매달린 비누는 서글프게도 보였고 열심히 살아가는 삶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늘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정확히 오후 6시 가량이 되면 일과가 대개는 마쳐졌다.
주문 받은 인쇄본을 맞추러 종로에 나갈 때에 친구는 그런 날 가끔씩 날 불렀다.
내가 지금도 속상한 것은 이 친구의 결혼이었다.
친구의 남편감은 내 친구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내 친구는 환경이 안 좋아서이지 정말 괜찮은 아이였었다.
책도 많이 읽어 생각이 건전하고 사색적이었으며
음악도 들을 줄 알아 음악으로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아이였었다.
집안을 일으킬 오빠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려 그 가고 싶어하던 대학도 포기한 채 그 지겨운 공간 안에서 라디오와 함께 5년을 버텨줄 정도로 희생적인 아이이기도 하였다.
그 모습이 그 아이의 본 모습인데 세상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가난한 집 여고 졸업하고 허름한 인쇄업 하는 아이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좋은 환경 아래 있었다면 공부가 계속 가능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아이에게 어울리기 보다는 그 아이의 환경에 어울리는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였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그분에게는 미안하지만 ...
그 아이 한번 씩 전해주는 소식으로는 대화는 안되지만 그런대로 행복하게 산다 한다.
이것저것 돈 되는 것은 가리지 않고 홍콩과 중국을 오가며 두 사람 열심히 사는 모양이다.
내 친구의 딸이 꼭 자기 엄마를 닮았다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것도... 헐렁한 웃음까지.
돈 버는 눈을 동남 아시아로 돌린 제 엄마는 그 아이 중학교 때 부터 중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 친구는 내가 우리 애들 공부 시키는 방법에 대해 별로 찬성하지 않는다.
죽어라 공부해서 고작 하는 것이 하루 종일 매여 사는 의사, 약사, 선생이냐고...
돈벌어 편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라면 굳이 고생시켜 그리 할 필요가 있느냐고.
친구는 아이들 어려서부터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사업가로 키우고 싶다했다.
과연 내가 기억하는 내 친구같은 생각이었다.
내 친구 중에서 인생을 가장 용감하게 사는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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