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 있을 때의 일이다.
마닐라 시내에 있는 예과를 다니다 예과와 본과가 함께 있는 시부에 있는 의과대학으로 옮기고자 시도할 때 쯤의 일이다.
그곳에 이미 알고 지내던 언니가 치대 본과에 다니고 있어서 그곳의 사정을 알아보고자 비행기로 그곳엘 방문하려 기숙사를 나섰다.
길도 익숙치 않고 영어도 서툴던 나를 위해 나보다 한 학기 먼저 들어와 있던 친구가 날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아이가 돌아가 버린 상태에서 그곳으로 가는 비행기가 그곳 기상 사정으로 결항되니 환불을 받던지 다음 날 비행기표로 교환하라는 방송을 듣게 되었다.
마닐라시 위생병원까지 나오는 학교 셔틀버스도 끊어진 시간이라 정말 난감하여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돈을 환불받고는 어설픈 영어로 그곳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있는가 하여 터미널을 물어보니 고속버스 터미널 같은 곳은 아예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달러를 좀 가지고 있다해도 대학을 막 졸업한 나이에 호텔에 들어갈 베짱은 없고,
마닐라시에서 약 30분 정도 시골길을 택시로 혼자 가야하는 것은 더더구나 무서운 일이었다.
그래서 난 무작정 택시를 탔다.
모른척하고 내가 가고자 하는 곳과 비행기가 결항되었지만 약속이 있어 밤이라도 꼭 가야 할 일이 있으니 그곳까지 가는 고속버스 타는 곳을 안내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곳은 섬 같기는 하지만 육로로 연결된 좁은 길이 있다고 들었고, 그곳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있다는 정보를 어렴풋하게 들은 기억이 있어 억지를 부린 것이었다.
고속버스 터미널은 없다손 치더라도 고속버스 타는 곳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맙게도 택시 기사는 여러 번 차를 세워 사람들에게 묻고 하더니 마닐라 도심 번화가의 어떤 사무실 같은 곳을 가르키며 그곳에서 말하면 된다고 알려주며 내려주었다.
세상 어느 곳이나 좋은 사람들은 있기 마련인가 보다.
내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이렇게 뜻하지 않게 좋은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되는 것을 난 무척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 사무실에 들어가니 정말 내가 가고자하는 곳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순서대로 돈을 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세시간 정도를 기다리니 고속버스가 오는 것이었다.
그 고속버스는 나의 기억속에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고속버스가 되었다.
밤 10시에 출발하여 다음날 오전 11시 가량에 도착했으니 아주 먼 거리의 여행이었다.
도심지를 떠나 산길로 연이어진 꼬불 꼬불한 길.
야자수 나무 위에 걸린 달, 달빛에 비춰진 산길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걱정도 근심도 없음은 물론 어른이 채 되지 않은 아이의 깨끗한 사춘기적 감수성까지 가지고 있을 때였으니 그야말로 잠이 찾아올 겨를이 없었다.
간간이 서는 간이 휴게소에선 우리에게 낯선 상황과 낮선 먹거리, 낮선 사람들로 꿈결에 보는 듯 생시같지 않았다.
에어컨 성능은 너무 좋아서 반팔차림과 팔부 바지를 입은 나는 거의 혹독한 겨울을 보내는 듯 괴로워 고속버스의 커턴을 벗겨서 덮고 잠이 들었다.
한참을 꼬불 꼬불 가다가 잠이 깨어 보니 내 신발 한 짝이 없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자는 앞사람에게 혹시 내 신발 한 짝이 당신 발 밑에 있지 않은지 살펴봐 달라 부탁하였더니 자기 발 밑에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그 앞사람에게 또 그 앞사람에게 ...결국 차안에 불이 켜지고 운전수의 안내방송으로 이어지더니, 결국에는 저 앞쪽에서 내 신발 한 짝이 들려졌다.
심야의 버스 안에서 잠자던 사람들은 짜증내는 사람 하나 없이 웃으면서 박수쳐 주고, 나는 상 받듯 나가서 내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찾아왔다.
얼마나 순박한 사람들이었는지...
필리핀에 가면 도둑들로 많고 현금 많이 가지고 다니는 한국인들이 표적이니, 너무 친절하게 접근하면 조심하라는 정보 아닌 정보들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나는 스스로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곳에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도착하게 되었고 비행기 결항 소식을 들었던 여러 사람들의 걱정에도 아랑곳 않고 나타난 나는 그 곳에서 용감한 아이, 겁 없는 아이로 반짝 소문나게 되었다.
그곳도 우리와 다를 것 없는 보통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들과 부벼대며 짧은 영어라도 별 부족 없이 혼자서 자주 돌아 다니는 편이었다.
갑자기 어제의 보름달을 보니 야자수 위에 걸려있던 낭만적인 풍경이 그리워졌다.
지금 내가 보는 보름달이 그곳 야자수 위에도 아직도 걸려 있으리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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