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문장들 입니다.
"이 생명나무에 우리가 가지로 접붙이기전에 먼저 사망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사망을 우리 몸에 가지고 그대로 그 거룩한 생명 나무에 접 붙혀질수도
없거니와
그 가지가 죽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면 결코 생명의 열매도 맺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위에 베드로 선배님이 하신 말씀 중에
"생명에 필요한,,,그리고 신성에 필요한,,,모든것을 주셨다" 에 답이 있습니다.
신격화에 죄로인한 사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라에게 아직도 사망이 있다면 그건 거짖말 입니다."
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간도 일을 추진하기 전에 이런 구조급 밑 그림은 필수적이죠.
그 당시 잠시 중단된 기초 작업이었던 아담을 땅의 기초로 두기 위해서 진행시킨
안식날의 그 구조를,,,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다시 볼 수 있는데요,,
이 예수를 하나님의 안식날로 초대해서는
이 예수를 안식날의 기초로(머릿돌) 마무리하신 구조를 말합니다.
아담이,,, 사망 혹은 사망에서 벗어남이라는 해방이냐 라는 그 지점에 다가선것은
하나님의 안식날 신격화 도면 구조상 아담만의 선택 지점입니다.
우리는 안식날의 도면상 우선, 창조물의 선택이라는 라벨을 붙히겠습니다.
소멸이냐? 혹은 소멸에서 해방이냐,,라는 창조물의 선택은 자동이 아니라 본인 인위적 선택이라는
에덴에서의 과정으로 된 장소라는 것이죠.
제가 이 말을 왜 하냐 하면은요,,
예수에 속하는 안식날인 믿음의 세계 즉, 예수안의 안식날 구조를 밝히기 위해섭니다.
"하나님의 의" 에 도달한다는 믿음 안에서 가동되는
안식날 구조와 에덴의 구조가 같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의 해방이,, 안식날 구조상 아담 때나 예수 때나 아주 똑같이,,
이 믿음의 안식날 구조 안에도 이미 예수 안에 입력되서
새 창조물이 된 신자들 각자의 선택으로 현재까지 가동 중에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섭니다.
하나님 창조 원칙입니다.
죄 짖기 전의 창조물 아담처럼,,,
우리 경우, 죄가 사해져야 가능한 지점임을 기억하신다면
여러 과정으로 된 안식날 구조 도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죠.
믿음 세계 안에서의 영의 소멸이냐? 혹은 해방을 통한 "하나님의 의" 에 까지 도달이냐, 라는
영의 생명도 이렇게 아담 때의 안식날의 과정들 중에도 존재했었다는 것이구요.
(물론 아담의 경우, 육체 부분에서부터의 미달로 인한 영의 진입을 할 수 없었지만은요.
예수는 이 두 영역 다 이루었기에,, 그래서 최종적으로 살려주는 영이 되셨기에
이 영의 기능을 믿는 신자들에게 먼저 줍니다.)
즉, 살려주는 영의 나무가 되신 이 생명 나무 예수를(십자가 사상) 어떻게 믿느냐가 관건이
되겠지요.
하나님이 다시 예수 안에서 가동시킨 믿음의 안식날 과정 중에서 발견되야 할
각자의 선택 문제라는것입니다.
왜? 어떤 논리로 이게 가능하죠?
이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죄 라는 말이 뭔지를 이해 하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불완전이라는 단어를 자꾸만 이미 6 번째 날에 완전품으로 완성된 인간 창조물에
적용시키는데요,,,
인간 아담과 이브는 이미 완전품으로 6 번째 날에 끝났습니다.
하등에 그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이 6 번째 날 인간 창조에 뭔가 빠뜨리고 우리를 지으셔서 죄로 인해서
육체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말인데요, 그럴리가 없죠.
그럼 아담도 이브도 불완전해서 죄를 지었나요? 심지어 능력자인 사탄도 하나님이 뭔가 빠뜨려서
그래서 애초에 불완전하게 창조된거 라는 의미입니다 그렀쵸?
죄와 육체의 완전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즉,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간 자체는,,,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아직도 완전품 그대로 입니다.
이런 행위들은 대부분이 사회성 오랜 습관이요, 본인의 선택으로 인한 행위 문제들 입니다.
즉, 인간 아버지가 살인했다고해서 그 아들도 살인할 수 밖에 없는, 간음할 수 밖에 없는,
사기치고, 술취할 수 밖에 없는,,'그래서 나는 불완전에 빠져서,, 할 수 없이 이 짖을 했다' 라는 것으로 뒤 덮어 쒸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는 그 뒤에서부터 '에잇,,될 되로 대라' 해서 간음하고 살인하고 사기치지 않았다 라는 말입니다.
아담과 이후 후손들의 행위 문제의 근원은,,,
자기 욕심과 지식의 경계선이 무너진것에 있습니다.
즉, 자아, 정체성과 관련된 의식 문제라는 것이죠.
선악과 담당부분인 육체의 생명의 원칙도 발견되야만 합니다.
그래서 아담이 선택한것과는 정 반대의 선택의 장소에 다시 설 수 있는 장소가 주워진다면,,
우리는 믿는 영과 동시에 우리의 육체에도 재 도전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즉,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 안에서 가동되는 두 나무 기능 앞에 다시 서게 된 기회를 의미합니다.
그 선악과 앞으로 다시한번 다가 가 보겠습니다.
그 선택이 우리에게 다시 한번 온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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