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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들 /담아온 글 ...

다시 오픈된 하나님의 동산(1)

아래는 이브의 수상한 욕심 마지막 편인 12편 글 중에서 

마지막 문장들 입니다.

"이 생명나무에 우리가 가지로 접붙이기전에 먼저 사망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사망을 우리 몸에 가지고 그대로  그 거룩한 생명 나무에 접 붙혀질수도 없거니와

그 가지가 죽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면  결코 생명의 열매도 맺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죄로인해 죽는데 어떻게 남에게 생명을 줄 수가 있습니니까?

위에 베드로 선배님이 하신 말씀 중에 

"생명에 필요한,,,그리고 신성에 필요한,,,모든것을 주셨다" 에 답이 있습니다.

신격화에 죄로인한 사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라에게 아직도 사망이 있다면 그건 거짖말 입니다."


창조주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어떤 일을 추진할 때에 먼저 구조를 가추고 일을 전개해 나가시죠.

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간도 일을 추진하기 전에 이런 구조급  밑 그림은 필수적이죠.


에덴 동산 당시,,, 

그 당시 잠시 중단된 기초 작업이었던 아담을 땅의 기초로 두기 위해서 진행시킨

안식날의 그 구조를,,,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다시 볼 수 있는데요,, 


예수를 아담의 replacement 자격으로 부르시고 

이 예수를 하나님의 안식날로 초대해서는

이 예수를 안식날의 기초로(머릿돌) 마무리하신 구조를 말합니다.


이 예수는 그래서 하나님에게 안식날의 주인 자격을 상속물로 받아낸 것이죠.


제가 위 문장에서 끄집어 내려고하는 포인트 두 개 중에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아담이,,, 사망 혹은 사망에서 벗어남이라는 해방이냐 라는  그 지점에 다가선것은 

하나님의 안식날 신격화 도면 구조상 아담만의 선택 지점입니다.


쉽게 구분을 위해서 선악과라는 초등적 의무 아래에서의 이 아담만의 선택을요, 

우리는 안식날의 도면상 우선, 창조물의 선택이라는 라벨을 붙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방식이 나오는데요,,,
아담의 본인 스스로 메뉴얼 선택으로써(자동적이 아니죠) 

소멸이냐? 혹은 소멸에서 해방이냐,,라는 창조물의 선택은 자동이 아니라 본인 인위적 선택이라는

에덴에서의 과정으로 된 장소라는 것이죠.


제가 이 말을 왜 하냐 하면은요,, 

예수에 속하는 안식날인 믿음의 세계 즉, 예수안의 안식날 구조를 밝히기 위해섭니다.


예수를 믿는것으로만,
우리의 심장이 소멸에서 해방되서 우리의 영이(육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 에 도달한다는 믿음 안에서 가동되는

안식날 구조와 에덴의 구조가  같기 때문입니다. 


창조물의 원래 선택 장소와 창조물의 임의적 선택으로인한 

죽음에서의 해방이,, 안식날 구조상 아담 때나 예수 때나 아주 똑같이,, 

이 믿음의 안식날 구조 안에도 이미 예수 안에 입력되서 

새 창조물이 된 신자들 각자의 선택으로 현재까지 가동 중에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섭니다.


이 구조가 하나님의 피와 땀인 예수로 다시 오픈된 안식날로 넘어간 에덴 동산이죠.


즉, 생명과 관련된 법,기준은요,,, 오직 생명과 관련된 사상에 달려있다는 

하나님 창조 원칙입니다. 


이 원칙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우선 창조물의 선택이 주워져야하는 동시에

죄 짖기 전의 창조물 아담처럼,,,

우리 경우, 죄가 사해져야 가능한 지점임을 기억하신다면

여러 과정으로 된 안식날 구조 도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죠. 


우선 영의 생명의 선택


우선 결론으로만 정리합니다.

믿음 세계 안에서의 영의 소멸이냐? 혹은 해방을 통한 "하나님의 의" 에 까지 도달이냐, 라는 

영의 생명도 이렇게 아담 때의 안식날의 과정들 중에도 존재했었다는 것이구요.

(물론 아담의 경우, 육체 부분에서부터의 미달로 인한 영의 진입을 할 수 없었지만은요.

예수는 이 두 영역 다 이루었기에,, 그래서 최종적으로 살려주는 영이 되셨기에 

이 영의 기능을 믿는 신자들에게 먼저 줍니다.) 


원칙에 의거해서, 이 영의 생명도 결국, 생명과 관련된 믿음 사상의 선택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살려주는 영의 나무가 되신 이 생명 나무 예수를(십자가 사상) 어떻게 믿느냐가 관건이 되겠지요.  


그 다음 ,,,
두 번째 포인트 중에 나머지 이슈가 될 ,,
아담의 죄에 묻혀서 나에게까지 전해진 육체 문제,,,인데요,
이 육체의 생명 문제는 약간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다시 예수 안에서 가동시킨 믿음의 안식날 과정 중에서 발견되야 할  

각자의 선택 문제라는것입니다.

왜? 어떤 논리로 이게 가능하죠?

이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죄 라는 말이 뭔지를 이해 하셔야 할 것입니다.


우선, 죄란,,, 불완전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불완전이라는 단어를 자꾸만 이미 6 번째 날에 완전품으로 완성된 인간 창조물에 

적용시키는데요,,,

인간 아담과 이브는 이미 완전품으로 6 번째 날에 끝났습니다.


이 인간 완전품에 죄가 들어왔다고해서 다시 완전한 창조물 자체가 불 완전품으로 변질된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오고 말고가,,
이미 완전한 인간으로 완성된 그 6째날 창조 자체에는 

하등에 그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럼 불완전으로인한 죄를 지었다 라는 그 불완전은 뭐죠?

혹시 하나님이 6 번째 날 인간 창조에 뭔가 빠뜨리고 우리를 지으셔서 죄로 인해서

육체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말인데요, 그럴리가 없죠. 

그럼 아담도 이브도 불완전해서 죄를 지었나요?  심지어 능력자인 사탄도 하나님이 뭔가 빠뜨려서

그래서 애초에 불완전하게 창조된거 라는 의미입니다 그렀쵸? 

죄와 육체의 완전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즉,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간 자체는,,,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아직도 완전품 그대로 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죄를 짓던 안짓던,,
우선, 선악과를 벗어나지 못하면,, 아담의 육체의 생명은 천년 만기일로 끝납니다.
즉, 하나님이 아담의 코에 불어 넣어주신 그 기본적 생명력은 1000 년 짜리 에너지였던 것입니다.


이 천년이 차는 동안에 아담은 두 나무 기능으로 자신을 모두 다 업 그레이드를 해야 영원히 살 것이었습니다. (계시록 20:5절 비교)    


그럼 죄는 자꾸만 왜 짓죠? 아담이 선악과 따 먹은거랑,,VS  인간이 살인하고, 음행 간음하고, 구타하고, 사기치고, 등등 육체적 악한 행위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대부분이 사회성 오랜 습관이요, 본인의 선택으로 인한 행위 문제들 입니다. 

즉, 인간 아버지가 살인했다고해서 그 아들도 살인할 수 밖에 없는, 간음할 수 밖에 없는, 

사기치고, 술취할 수 밖에 없는,,'그래서 나는  불완전에 빠져서,, 할 수 없이 이 짖을 했다'  라는 것으로 뒤 덮어 쒸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는 그 뒤에서부터 '에잇,,될 되로 대라' 해서 간음하고 살인하고 사기치지 않았다 라는 말입니다.

아담과 이후 후손들의 행위 문제의 근원은,,,

자기 욕심과 지식의 경계선이 무너진것에 있습니다.

즉, 자아, 정체성과 관련된 의식 문제라는 것이죠.


물론 바울의 고백처럼, 아담과 이브의 행위로 된 그 경향의 피가 우리에게 어느 정도로는 우리 후손들 생각에서 작용은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피가 창조물의 어떤 기본 능력을 앗아가서 완전품을 불 완전품으로 변질했거나.
이것이 후손들에게 유전되서 죄를 할 수 없이 지울 수 밖에 없는 장애자 후손을 낳은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은요,,, 예수 안에서 가동되는 안식날의 기능 중에서 

선악과 담당부분인 육체의 생명의 원칙도 발견되야만 합니다.


이 선악과 기능에 우리가 촛점을 다시 맞추어 육체의 생명을 볼 수 있는 철호의 기회가 주워진다면,,,

그래서 아담이 선택한것과는 정 반대의 선택의 장소에 다시 설 수 있는 장소가 주워진다면,,

우리는 믿는 영과 동시에 우리의 육체에도 재 도전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즉,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 안에서 가동되는 두 나무 기능 앞에 다시 서게 된 기회를 의미합니다.


우선, 죄된 아담의 육체인 우리 육체의 죄를 위해 장사되신 예수의 죽음에 힘을 입어서 

그 선악과 앞으로 다시한번 다가 가 보겠습니다.

그 선택이 우리에게 다시 한번 온 것이죠.


우리의 제 2 선악과 예수 앞에 다시 서게 된 것입니다.


(계속되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