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늘 외할아버지를 걱정을 하셨다.
당뇨병을 거의 사십 년 넘게 가지고 계셨기에 합병증을 두려워하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매일 아침은 영도에 계시던 외가 어른들의 인슐린 주사를 놓아 드리고 오시고 나서
시작되었다.
시계추처럼 정확하셨던 아버지는 우리가 부산에 내려온 이후로
그 일을 단 하루도 걸르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렇게 외가 어른들의 크고 작은 건강상의 문제를 체크하시던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보다 삼 년 더 먼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큰 건물 옥상에서 딸과 함께 둘이서 살고 있는 어머니를 참 안타깝게 여기셨다.
도심지 한 중심, 빌딩 숲 사이의 건물 옥상에 지어진 집,
할아버지는 늘 그 집을 새장이라고 부르셨다.
당신의 건물 옥상에 놓여진 그리 작지 않은 정원까지 달린 아담하고 예쁜 그 집을
할아버지는 왜 작은 새장이라 여기고 계셨는지는 모르겠다.
바깥 나들이 없이 집밖에 모르는 어머니가 여린 새로 보이셔서 그랬을까...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살만한 삭막하지 않은 집을 사 주시려고 마음을 쓰셨었지만
집안의 큰 며느리가 이미 들어와 계셨고
유산상속은 채 아니지만 그래도 먼저 재산 분배가 어느 정도 되어 있었기에
예전처럼 할아버지 마음으로만 그리 될 일은 아니었다.
원한다면 어머니가 어머니 돈으로 나오셔도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할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셔서 한달에 두 세 번 정도, 대학 병원으로 입원과 퇴원이 계속되었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몸이 막바지를 치닫고 있다는 것은 아셨던 것 같았지만
당신이 돌아가실 것이란 그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은..'이란 여유는 갖고 계신듯 싶었다.
돌아가실 것 같아 산소호흡기를 꽂고 영도 집에 모셨던 다음 날
상태가 아주 좋아지셔서 모두들 고비를 넘겼다고 안심을 했다.
이모들은 옆에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말씀하시라며 유언듣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들으셨는지 못들으셨는지 눈만 뜨고 계셨다.
모두들 할아버지 옆을 떠났고 마지막으로 자리를 일어나시던 큰이모가
"어쩌지! 우리 애가 고3 인데 이렇게 계속 기다릴 수도 없고...
어떤 분들은 이런 상태로 열흘도 더 간다던데..."
평소 현실적이고 입 빠른 소리를 하시는 이모의
지금 말이 섬뜻하게 마음에 걸려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천천히 그리고 나즈막히
"걱정마라.. 오늘 오전 중으로 나는 간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그 말씀은
다행히 옆에 앉아 있던 나만 듣고 있었다.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라 그 이야기는 영원히 안 들은 것으로 해버렸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큰삼촌에게 무얼 해 주고.. 정암이네는 무얼 해 주고..라는 유언을 한참을
떠듬거리시며 하시고는
허무하게 너무도 허무하게 운명하셨다.
할아버지의 유언은 옆을 계속 지키고 있던 나만 들었다..
알아들을 수없는 말이지만 모두 할아버지 마음인지라
나는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었다.
설사 누가 듣는다 해도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유언이었기에
나는 차라리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할아버지의 마음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던 것었던 것이다..
평생의 짐이셨던 큰삼촌과 혼자되신 내 어머니만을 언급하는 이야기뿐이셨다.
이렇게 딱 두 자녀에 대한 걱정과 마음을 남기시고 가시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그 자리에서 감사히 받았고, 그것을 내 어머니께 전해 드렸다.
내 할아버지의 유언은 따뜻한 사랑과 애틋한 아픔과 걱정이었다.
이상한 이야기같지만..
그래서 나는 한 번씩 내 친정 어머니이지만
할아버지에 대한 의리로서도 어머니를 생각할 때도 종종 있다.
나의 외할아버지의 유언은 그렇게 지금도 내 마음에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