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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1/5

싸늘한 공기와 날카로운 아침 햇살을 받아들이며...

싸늘한 기온과 너무도 강렬해 도리어 차갑게까지 느껴지게 하는 아침 햇살이

오래 전 어느날 아침과 느낌이 너무도 똑같았다.

 

필리핀에서 무작정 돌아오고 맞이한 아침,

간밤에, 도무지 믿어지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돌아가심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내 눈 앞에 주어진 장례식 사진들은,

살아있는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쇠창살을 내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밤을 보내고 나니, 

이성을 끌어안아 그 차가운 얼음에 데인 심장과도 같은 싸늘한 기온과 

너무 강렬해 도리어 차갑고 날카롭게까지 느껴지는 햇살로 머리가 시리도록 맑아지는 

아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침에 난,

더 이상 다른 길 없는 생소한 길 앞에 내몰린 아이처럼,

한 발도 그 아침으로 나설 수 없는 두려움을 가지고,

그 아침을 버티고 서 있었다. 

 

 

아주 오래된 옛적의 이야기다. 

그 당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너무도 빈약하던 나에게 그 부담스런 아침은

내게 아침이 아니라 어두운 밤을 향하는 어슴프레한 저녁과도 같았다.

환한 빛이신 하나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계셨지만,

세상을 모르는 아이, 움직이던 제 그림자에 놀라 그 그림자 난 방향으로 눈을 감고 뛰어가기 시작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돌아가심의 충격보다

늘 내 기도를 귀담아 듣고 계신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때까지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방적인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너무도 아프고 두려웠기에 도망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멀리 멀리 하나님 생각이 나지 않는 곳으로 가려 마음 먹었다.

그리고 결국엔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지금은 아니라며 또 달렸다. 

그런데 그리 멀리 가지도 못하고서 하나님이 그리워졌었다.

 

일방적인 착각이라도 좋았다.

그분을 사랑할 가치는 이미 오래 전에 내 가슴에 인식되어 있었기에

설사 영화 '가위손'에서 가위손 에드워드를 만들어 놓고 죽어버린 과학자가 내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태어난 성에서 평생을 자신의 창조자를 그리워하며 정원 가꾸기 소일을 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나의 한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나의 생명의 의미가 이미 그분에게 있었으므로 내가 그분을 떠나 사는 것은,

물결치는 대로 물 위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니는 부평초 인생으로 사는 것으로서, 

결국 내가 살고 싶었던 인생의 방향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함을 내 눈으로 확인하는 데에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분께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분이 날 사랑하시든 관심이 없으시든 그것은 나에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이미 사치라는 것을 알아버린만큼 내가 가난해져있었기 때문이었고,

나의 상처를 다시 보기 두려웁다는 여린 생각을 하기엔

그림자 난 쪽으로 달려가면서 넘어진 상처들이 더 현실적으로 아팠기에

들여다 보기 두려웠던 상처는 이미 호사스런 아픔 더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그 싸늘한 공기와 날카로운 아침 햇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리어 어두운 밤을 향하는 어슴프레한 저녁으로,

밝은 빛쪽이 아닌 그림자가 드리워진 쪽으로 눈을 감고 뛰어가던 나의 아주 어린 모습을

떠올리며,

차갑고 날카롭지만 그 밝은 해를 향하고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