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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이야기/3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틀에서의 변화

요즘 생활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만족감이 들어서 드리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 생각이 나지 않아 하나님께 머쓱해져 있거나,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인지 뻔히 알면서 어린아이들 숨바꼭질하듯 얼굴만 가리고 해버린 일이 있거나,
하나님께서 지금 요구하시는 것을 알면서, 그 것을 안하고 지금 필요한 제 눈앞의 일을 하고 있거나,
머릿속으로는 용서해야지 하면서 마음속으로 미움을 저장하고 있거나 할 때
저는 늘 하나님으로부터 자꾸 도망가곤 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벗어 날 수 없는 저는, 자녀가 아니라 종의 모습처럼, 그분께서 지금 요구하실 것 같은 일들만을 생각하고 제가 해야할 일들을 생각하고 행하려 하였습니다.


제가 요즈음 하나님을 섬기는데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이유를 게속해서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답을 얻은 것은 제가 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틀이 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교회나 조직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고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곳에서 그 조직의 시각에 맞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틀의 결과물까지  함께 얻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폭넓게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받아들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크기만큼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틀은 

어쩌면, 저 스스로가 만든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그 틀에 매이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람쥐 챗바퀴 돌리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제껏 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하나님과의 단절감이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남 보기엔 부족한 것 없는 그런 환경이 주어졌지만

제 인생길이 늘 그랬듯

내면에는 늘 바람 맞는 자리에 서있게 되었고

그 환경을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인내를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뿌리로 하는 자중심을 갖지 않고서는,
바람 앞에 흩날리는 겨와 같은 현실과 불과 같은 제 자존심 사이에서
저는 연소되어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선천적으로 자기 방어를 잘 못하는 저에게, 하나님과의 단절감은

제 신앙적인 자중심까지 위태롭게 만들어

결국엔 제가 누구인지,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의도와는 다른 상황에서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제가 감당해야 하는지, 하나님은 왜 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은지, 하나님은 계시기는 한 것인지,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황까지 몰고 가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감은 늘 외로웠던 저에게 남들은 입지 않을 더 많은 상처까지 입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서의 고통이 너무도 두려워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는 어떤 것도 극히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단절감을 피하고자 하는 저의 인간적인 노력이 저에게 그것이 도리어 덫이 되어 버리는 것을 곧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틀에 맞추다보면
행위 중심의 신앙생활로 연결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과의 단절감은,

제 스스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틀이 만들어낸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우물 안의 개구리가 자신이 인식하는 하늘 정도 수준 정도로 하나님을 인식하였던 것 같습니다.


증인이 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많은 구체적인 지식을 갖게 되어 훨씬 나아졌지만 그곳 또한 사람이 만든 조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덫을 또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신권조직이라는 이름 아래 주어진 새로운 덫은
또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는 덫인지 인지되지 않았습니다.
그 새로운 덫 또한 행위 중심의 생활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행위 중심의 신앙생활과는 다르게 신권조직이라는 믿음 아래
신민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행동지침 등이 파수대나 깨어라 잡지 혹은 회중으로 전달되는 편지 형식으로 구체적으로 전달되고 전체적으로 요구되었기에


행위 중심의 신앙생활이면서도 신권조직이라는 각도에서 보면 선민의식으로 인한 자부심, 성취감, 자중심 있는 안정된 생활,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한 자부심등으로  보여졌지요.

 

사람의 모든 조직으로부터 자유롭게된 후
제가 인식하던 하나님의 틀이 얼마나 비좁고 틀어졌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우물에서 나와 하늘을 보고 또 우주적인 관점에서 하늘을 보게되니 하나님의 틀은 너무 광대하여 제 입으로 제 머리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 제 분수에 맞는 것이라는 생각될 정도의 틀이었습니다.

제가 인식하던 하나님의 틀이 변하니
저 역시 그 비좁던 틀 안에서 맞추던 생각과 행동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제 아버지가 백만장자이고 아버지가 제게 바라는 것은 아버지를 닮아가면서 훌륭한 인격을 갖추며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을 바라시는데,
저는 아버지를 사랑하여 더 큰 일도 해낼 수 있는 자식이 아니라,

아버지 집의 품꾼처럼,

아버지에 대한 사랑보다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여 칭찬 받으려 하는 태도에만 고착하는 자세로 살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점차적으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걸음마 수준의 걸음을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만 쓰는 것에 멈춰버린 모습이 아니고

넘어지고 엎어지는 단계를 밟아 걷고 자유롭게 뛸 수 있는 단계로 발전하기를 바라시리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을 즐기는 여행자가 실수로 넘어지는 것을 겁내지 않듯
우리도 믿음의 긴 여정을 가야하는 여행자라는 면에서

넘어지지 않으려는 걸음마 수준의 안간힘에만 머무르는 자세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자각으로 인해 믿음의 생활이 훨씬 자유롭고 평화로워 졌습니다.   

저는 사람이 만든 모든 조직을 떠나고 나서부터  

제가 인식하는 하나님의 틀에서부터로도 자유롭게 된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종이 아닌 자녀의 자유로움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요즘에 많이 듭니다.

그래서, 어쩌면

성령의 활동을 진정 막고있는 것이 도리어 사람의 생각, 사람의 조직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