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남보다 잘난 것도 없지만 그래도 제 분수의 선을 잘 넘지 않는 까닭은
어렸을 적부터 죽음에 대해 눈여겨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제가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접했던 것은 제가 대 여섯 살 때쯤으로 기억됩니다.
길에서 노제를 지내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길거리에 바탕이 하얀 색이고 까만 줄이 그어진 장의차가 서고, 관이 내려지고, 병풍으로 관을 가린 후 큰 상 위에 많은 음식이 차려졌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던 듯 싶습니다.
쾌창한 아침이었던 것 같고, 워낙 처음 보는 낯선 구경거리라 저는 바로 앞에 가서 유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영정사진이 상 위에 있었고 사람들이 머리에 무엇인가를 두르고 상복을 입었기에 누군가가 죽은 거라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의식이 끝날 무렵 상복을 입은 사람이 떡을 떼어서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도망가고 저는 주는 떡을 마지못해 받아들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도 죽음과 관련된 음식이라 왠지 더러운 것 같아, 제 마음은 그 떡을 먹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어른이 주시는 것을 거부 못해 억지로 받아 든 것이었습니다.
장의차가 떠나고 저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항아리가 많이 재어져 있는 길가에 몰래 버리고 집에 왔습니다.
집에 오니 먼저 도망갔던 오빠와 저와 나이가 같은 외삼촌이
"지영이는 노제 지내던 길거리 떡까지 받아먹었다" 고
일러바치고 저를 놀려대었지요.
그 때는 참 부끄러웠다는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 때의 기억이 지금껏 그리도 선명한 것은, 사실과 다른 고자질로
노제 지내던 떡까지 얻어 먹는 아이로 보여지게 된 억울함이 깃들여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억울함은 마음이고
머릿속에 남은 영상은 노제 지낼 적 상 위에 있던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섬뜩한 관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쯤인가 집에서 토끼를 키웠습니다.
동생이 하도 졸라서 가을에 토끼 두 마리를 아버지께서 사오셨는데 한 마리는 흰색에 빨간 눈의 토끼였고 다른 한 마리는 갈색 털의 토끼였습니다.
풀을 뜯어다가 먹이고 키우는 것은 제 몫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오자 토끼는 집 안 목욕탕 안에서 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에서 살 때이니 토끼장을 만들 나무도 없었고 늘 아버지는 바쁘시니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물을 싫어하는 토끼를 목욕탕 한 구석에 종이 박스와 헌 담요 위에 두었으니 환경치고는 열악했다 싶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제가 예뻐하던 갈색 토끼가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통곡하고 울면서 죽은 토끼 얼굴을 만져주었습니다.
사실은 죽은 것이 무섭고 섬뜩하였지만 살아있을 때의 의리를 생각하여 꾹 참고 만졌던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용기를 내었던 것이었고 마음속으로는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나름대로의 자부심 같은 것이 생기면서 앞서 감정들이 누그러졌습니다.
저의 속마음도 모르는 제 어머니는 죽은 토끼를 끌어 낼 방법을 모색하던 중 죽은 토끼를 만지는 저를 보고 해결책을 찾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저보고 죽은 토끼를 해결해 달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땐 어른이 시키는 일을 거절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죽은 토끼 귀를 살짝 잡아보니 축 늘어져버리는 것이 정말 괴로웠습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집 밖 언덕 위 땅을 파고 묻어주었습니다.
어른이 되고 지금은 호주에가 있는 친구랑 이야기하던 중 죽은 토끼 묻어준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너 정말 불쌍하게 컸구나"하기에 억울한 생각이 나서
제 친정 어머니께 새로 따져보았습니다.
무심한 제 어머니 말씀이 "난 죽어있는 것을 보고 근처도 못 가고 있는데 넌 죽은 토끼 얼굴을 살아있을 때처럼 만지고 울기에 넌 괜찮은 줄 알았지."하셨습니다.
...
어쩌면 지금은 잊었지만 유독 심장이 약하시던 어머니한테 아예 기대도 안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어 축 늘어진 토끼는 참 무거웠습니다.
그 허무하게 죽어버린 토끼 옆에 있던 흰토끼가 어찌나 불쌍해 보이는지
다음 날 학교 동물원에 데려다 주는 것으로 해결하였습니다.
어릴 적 저에겐 이 두 가지 일로 죽음이란 것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고,
제가 좀 커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제가 진짜 제 분수를 아는 길에 가장 도움을 주는 것이
죽음의 현상을 기억하는 것임을 알게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죽음이 오게 된 경위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한 죽음에서의 해방을
성서에서 알려 주시니 죽음은 저에게 더 이상 칙칙하고 두렵고 무서운 것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부각시켜주며 우리는 그분께 아무런 할 말이 없음을 알려주는
큰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젊은 날의 모든 의문들을 내려놓고 쉬게 해준 큰 나무. (0) | 2006.08.19 |
---|---|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틀에서의 변화 (0) | 2006.08.11 |
어느날의 일기 (0) | 2006.08.11 |
여호와의 증인 -오염되지 않은 물99%에 극약1%섞인 생수 (0) | 2006.08.11 |
행복하지만 아주 외로운 길을 떠나게 된 첫날 (0) | 2006.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