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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들 /담아온 글 ...

[스크랩] "잠자는 이여,, 죽음에서 일어나라!." (마지막 때와 일으킴 마지막편)

 

"잠자는 너, 이제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비추시리라"    에베소 514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음이라는 형벌 아닌, 형벌을 안고 태어 나죠.

장담하건대,, 이 운명의 길을 피해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고요.

 

이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는 원치 않는 친숙한 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죠. “너희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는 말씀대로

동물에게 임하는 죽음의 일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에게도 일어나니 말이죠…

 

 

이처럼,,전편 글에서와 같이,,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머무는 장소란  -1, 지하층인 것이죠.

 

하지만  이 컴컴한 -1  지하층에,, 빛으로 된 복음의 소식 하나가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것도 수 천년 동안에 걸쳐서,,, 매일 매일,, 날아 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정해진 때가 차자,, 

 

하나님은  한 사람을 이 지하 층이 어둠 속으로 보냅니다.

 

이 사람은 인간 족보 계열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 납니다.

하지만 거룩함으로 는,, -1 지하의 죽음을 거쳐서 -->   +1 부활로 마치신 존재이며,

이 죽음과 부활이라는 창조의 길을 완성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따 내신 예수라는 분 입니다

 

바로 이 예수가 우리가 머물고 있던 "흑 암이 깊은 어둠 속",, 죽음의 장소로 

빛의 생명인 새로운 살과 피로 투하 된 것입니다.

 

수 천년 동안 굳게 닫쳤던 죽음의 지하 문이 드디어 문이 열리고

이제 영원한 해방의 출구가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이 지하층의 대 다수 사람들은 이 해방의 출구를 믿지도, 보지도,않을 뿐더러,

오히려 이 출구를 없애기까지 하는,, 자신들의 행동인 어둠의 일을 더 좋아해서

그 어둠의 장소에 계속 머물기를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여 악을 행하였으며,

그 결과 빛을 미워하고 피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를 행하는 자들은 이 빛으로 올 것인데,

그 결과 하나님의 의도인 그들의 행위가 빛 가운데 나타나기 위함"   입니다.( 예수의 증언들 중에서,,)

 

이 어둠 속에서 빛의 나타남,,즉 빛이신 예수의 나타남이란,

인류 최초로 빛의 생명의 나타남 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원 높은 빛의 생명이 결국,,,사람의 생명이 되는 획기적인 기회가 열린 것입니다.  (요한의 증언14)

 

그리고 이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은 먼저 죽음을 파괴하는 행위로써

그 죽음을 거치고,온 갓 선함진리로 된 행위로 나타날 것입니다.(에베소 5:9)

이들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이 그 빛으로 나타나는 과정, 혹은 속성의 행위들인 것입니다.

 

이 예수라는 사람은 인류에게 특별한 기회가 되는 역할을 해 주었는데,

 

그 기회란,

 

죽음의 울타리의 해방의  이라는 출구였고,

 

그 문 밖으로 이어진  빛의 ,즉 빛으로 된 선한 행위들 이였으며,

 

그 행위의 길을 걸어서 결국 빛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들이 빛 가운데 나타나는,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기회였죠.

 

 

 

그러니  예수는 “나는 문이요”,, “나는 길이요.,, “ 나는 영원한 생명이다”  라고 자칭 표현했죠.

 이 진리의 이 예수의 마지막 때 나타남 이자 이자, 신만의 생명 수준인 선과 악을 구분하는 ""  입니다.      

    

" 예수의 나타나심으로(appearing) 이제 확연히 들어 났으니,

 

1)죽음을 먼저 파괴하시고 우리에게 빛으로 된 영원성과 생명을

 

가져다 준 복음을(진리) 통해서 입니다.,,,"  디모데 후서 1 9-11

 

 

이 예수라는 그 매일 매일의 복음 속 주인이

실제로 이 -1 지하층에 이러한 기능으로 직접 appearing,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능으로 오신 두 번째 사람 예수는

 

육체적으로는,, -1 지하 층에서 활동하여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서

                        가장 시급한 일인 발등에 떨어진 불을 먼저 꺼 버리는 작업을 하시고

 

영적으로는,,,,, 자신의 몸인 성전에서 하셨는데요

 

그 작업이란,,바로

,, 나는 무덤과 죽음의 열쇠를 가진 자 니라,, (계시1:18) 라는 그분의 권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마귀,,죽음의 권세 잡은 자 마귀” 에게서 그 죽음과 무덤의 열쇠(권한)를 자신의 죽음과 무덤으로 합당하게 지불하고

전쟁 같은 치열한 법적 공격을 그 마귀와 그의 악귀들에게 퍼 부어서 그 권한의 열쇠를 아주 영원히 빼앗아 오신 분 입니다.

 

이 시급한 발등의 불 부분을 정리한 후,,, 하나님의 부피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가신 길 시작부터--> 그 끝인,,모든 길이란,,

 

깊이로는,,, 가장 깊은 어둠의 장소인 죽음의 깊이 즉 ,,  -1 지하 층에서부터 그 깊이가 놓여 졌으며,

 

높이로는,,  가장 높은 빛의 생명의 장소인 하나님의 왕좌 라는 높이까지 연결되는 문이 생긴 것이죠.

 

더 나아가 길이로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의 를 기준하여 하나님의 끝이 없는 자비와 은혜라는 끝 없이 펼쳐진 길이었던 것이었죠.

 

이제 -1 인 컴컴한 지하층 죽음과 무덤에서 해방될 수 있는 그 죽음의 문의 권한인 열쇠를 소유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마침내,,빛의 영역이 이런 부피로 어둠 속에서 팽창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빛을 낮이라 칭하고 밤을 어둠이라 칭하는 심판의 시작을 의미 합니다.

 

빛의 출현으로 빛과 어둠을 나누는 일이 시작된 것이죠.

 

그러므로 이제 예수는,, 이 길의 시작인 -1 지하층 주인도 되신 것이죠,,

물론 지상 0 제로에 거하는 주인도, 더 나아가 +1 에 거하는 모든 하늘의 주인도 되시지만,,,

우선 -1 지하층에서 이 길을 걷기를 원하는 그의 믿음의 후손들 모두에게, 발등에 불인 죽음을 먼저 꺼 줘야 하는

이 열쇠를 사용하시는 유일한 주인이심을 강조하는 것이죠..    

 

이 죽음과 부활이라는 권한이란,, 심판과 생명들은 물론 이거니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모든 권한이 포함된 통합 개념 입니다.

 

그러니 왕좌 라는 다스림까지 내포된 하나님만의 재산을 자신의 후손에게

분배 혹은 상속 시킬 수 있는 권한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자신의 희생적 숭배 행위로 이 기능을 하신 예수는 이 권한의 주 격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예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인 왕좌 오른편을 정해진 기간까지 다 맡기셨습니다.

** ( 참고,,지금은 불순종하는 원수지만,,그래서 왕좌가 필요하지만,,결국, 모든 원수들은 예수의 왕 권한(기능) 안으로 순종할 것임. 복종 이후에는 왕 권한이 필요 없기 때문에 정해진 기간까지라는 의미임. 왕 제도는 하늘에서나 땅에서 완전한 상태에서는

의미도, 필요도 없음  그러므로 한정 된 상황인 ,,모든 원수들이 복종할 때 까지..만 필요함)**

 

그렀다면 지하층 -1 에 거하는 어떤 부류의 믿음의 후손들이 첫 번째로 이 죽음의 열쇠로 해방되어 나 올 것입니까?

 

지하층과 지상과 하늘,,,

즉 모든 하늘과 땅과 바다와 지하를 상속받은 이 예수는 먼저 누구에게 이 죽음에서의 해방의 열쇠를 사용하실 것인가요?

 

이 해방의 열쇠는 문자적 시간에 제한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 해방의 열쇠는,, 죽음의 권세를 잡았던 전 주인 사탄과는 더 이상 관련이 없습니다.

이 해방의 열쇠는 오직 믿음의 법에 따라서 영으로,, 신자 각자에게 각각 작용할 것입니다.

이 해방의 열쇠는 그 과정인 죽음이라는 자물통과  부활이라는 열쇠,, 두 부분으로 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정확한 자물통 안에서만,,,

   해방이라는 열쇠가 들어가서 서로 맞아 부활이라는 영원한 빛의 길로 연결 됩니다.

 

그러므로 일반 인류가 죽는 그 죽음으로는 이 해방의 열쇠가 작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 보통 인류의 불신자들이나 혹은 비록 신자일지라도, 문자적 죽음은 그 져 죄의 삯인 대가를 치른 것에 불과하니까요.

제 말의 의미는

이들 일반 인류가 죽을 때 죄의 대가가 치러졌다는 것 자체가 곧  죽음에서 해방 되야 할 이유가 아닌 것 이란 의미 입니다.

그런 논리라면 예수의 대속이 따로 필요 없겠죠. 모든 인류 다 한번씩 죽는 일로,, 그 죽는 일로 죄의 삯을 치르고 부활되면 되니까요 그쵸?^^

 

(참고***마치 계시록20:11절로부터 시작되는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 무덤에서 부활되어 나 온 인류가 계속 죽음으로 묘사된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즉 이들은 문자적으로 부활 되었어도, 문자적 신체적 부활과는 관계없이 가치상,,계속 죽음 속의 -1 지하층 입니다. 이들은 죽음 속에 계속 갇쳐 있어야 그 죄의 삯이 작용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들의 죄의 삯인 죽음에서 완전한 탈출인 생명으로의 전환은 별개 입니다. 오직 합당한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논리죠. 즉 이들이 머무는 무덤이라는 저장 장소에서 머물 때에만 죄의 삯을 치르는 것이란 의미죠. 생명으로 이동해야 할 합법적 이유가 필요하며,,그때까지는 비록 신체적으로 부활했어도 죽음이라는 시각이죠)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잠시 새 나갔네요.

 

그럼 이 길,, 예수의 길의 시작이자, 처음 놓여진 -1 지하층에서

어떤 부류의 신자들이 이 해방의 열쇠로 나 올 수 있습니까?

 

이들은 어떤 죽음으로 죽었길래,, 지상 제로로 해방되어 구원받고(SAVED, RESCUED, 구출)

영원한 구원(SALVATION)으로 인도 받기 위해 예수의 두 번째 appearing 을 희망 속에 기다리는 중일까요?

 

이들의 죽음은 왜 해방의 열쇠를 담기에 딱 맞는 자물통 죽음으로 죽는 것일까요?

 

이들의 예수와 같은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들의 과정의 죽음 후, 일어남 이라는 새 생명으로의 과정은   

과연,, 인류가 가는 무덤에 해당 할까요?

 

 

여러 부류의 믿음의 층들과 이들이 경험하는 죽음들,,

 

 

A) -1 지하층에서 부 터 나 온 첫 열매들,,, 

 

"이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구속 받은,, 어린 양과 하나님께 바쳐진 첫 열매들 입니다." 14: 4   

 

영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로 열린 열매들이란 어떤 의미에서의 첫 열매 인지요?

 

이들의 신분은

로마서 8장에 잠깐 언급된 바울 자신을 비롯한 형제들,",,영의 첫 열매,," 들로써

계시록 7장과 14장에 언급된 "예수와 함께 시온 산에 서 있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이름이 이들의 이마에 찍힌 종들"  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영의 어떤 과정을 거쳤기에 "영의 첫 열매" 라는 예수의 또 다른 이름을 함께 나누는 것이죠?

 

영의 첫 열매,, 영이 하신 첫 번째 열매,,

설마 이 영원하다고 한 열매가 죽어 무덤으로 간다면,,,

과연 영이 하신 첫 열매의 차원이란,, 죽음의 권한을 가진 자인, 사탄조차도 넘을 수 없는 ,,

그래서 죽음이 하나님의 일인 영의 열매를 무덤에서 썩히는,,, 그런 수치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하지만 정 반대로,, 떳떳하게도,,, 죽어서 무덤으로 가는 창피하고 수치스런 일과는 정 반대로,,

영의 인도에 따른 이들의 과정이 로마 6장에 고스란히 적나라하게 들어 나 있군요.^^

바로 죽음의 독침을 어떻게 그리고 무엇으로 꺾어 버리는지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타나는 군요.

 

죽음아!! 사망아!! ,,, 너의 쏘는 그 독침이 어디 있느냐?

 

6 1절부터 바울은 이제 자신의 영의 인도 과정을 그대로 고백하게 됩니다.

"We have die to sin; how could we go on living in it? " 라고요,

 

그리고는 이 "we have die to sin" 이라는 죽음의 과정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말하죠.

바로 "when we were baptized into Christ Jesus,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라고 하면서

예수의 죽음 성격과 그리고 신자들이 그와 하나가 되는 침례 관계를 연결시켜 고백해 나갑니다.

 

그리고는 ,,,핵심 되는 "예수의 죽음"의 성격을 10절에 이렇게 밣힙니다.

 

",,For the death he died he died to sin, once for all,,," 라고요.

 

 

한국어로는

"그가 죽은 그 죽음은 죄에 대해서의 죽음이며, 모든 죄를 단 한번에 처리한 것입니다." 가 되겠죠.

 

실례를 무릎 쓰고 형제에게 한번 이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한번 스스로 답해 보실 수 있겠습니다.

 

형제의 정신에서는,,,

'예수의 죽음이란 죄에 대해서의 죽음이다'  라는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되고 있습니까?

 

어떤 선인이,,제 아무리 선한 일로 인생을 살아왔던들,,,

그 사람이 죽을 때에는,,,그의 죽음은,, 그의 일생 동안의 선한 행위들과는 무관하게도

죄의 삯으로써의 죽음 즉 죄의 댓가 겠죠.

그 선한 사람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다 라는 말 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죽음은 죄에 대해서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 죄에 대해서란 무슨 의미인지요

예수의 죽음이,, 죄의 뭐에 대해서 죽음이라는 의미라는 질문이겠죠

 

죄 때문에 죽었다 라는 아담의 죽음,,, 

그리고 그의 후손인 우리들의 죽음들,, 별 다를 게 없는 죽음인,, 죄의 삯 이겠죠.

그러니 우리 인류의 죽음이란 죄 때문에 죽는다 라는 문장이 나와야죠. 그렇지 않겠어요?

 

하지만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예수의 죽음이란,, 우리처럼,, 죄의 삯으로써가 죽음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즉 죄 라는 근본적 개념에 접근해서, 혹은 다가가서,,

그 죄의 근본에 해결을 위해서,, "죄에 대해서 죽었다" 는 것이죠.

이 차원의 죽음은 문자적이자 신체적 죽음보다 더 사실적이고

더 나아가 생명과 관련된 법적 차원을 충족시켜주는 측정할 수 없는 가치로써의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 믿음의 후손들 역시 이 예수와 같은 죽음으로 죽는다는 의미 입니다.

단어만을 놓고 따진다면,, 둘 다 같은 죽음이라는 단어지만,,

그 가치 속에서 작용하는 힘이란,,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별 지는 죽음일 것입니다.

 

이 예수의 죽음인 죄에 대해서의 죽음과,,,(솔직히 저의 심정을 말한다면),,

,, 우리 인간이 맞이하는 문자적 죽음,,

즉 죄에 대한 죽음 VS 죄의 삯으로써의 당연한 죽음 이란,, 

서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차원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 죄에 대해서의 죽음이 더 현실적인 죽음이자 더 실제적인 죽음이라는 것이죠.

 

제 말은,,

매일매일 인간사회 내에서 일어나는 이 죄의 삯으로써의 문자적 죽음이란,

우리 믿음의 신자들이 경험하는 "죄에 대해서 죽음" 과 비교할 때

이처럼 가치 있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이지도 못하며, 죽음의 깊이 면에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라는 뜻이죠.

 

하지만 많은 기독 신자들은 예수의 죄에 대한 죽음을 단지,,, 행동의 전환쯤 되는 비유 정도로 떨어뜨려 놓는

그래서 죄의 삯인 문자적 죽음만을 죽음으로만 아는,,, 죽음의 세뇌 속에서 그의 종살이로 죽어야 하는 믿음을 택한 것이죠

 

이들의 정신 속에서는 이 죄의 삯인 사망이라는 형벌 죽음만이 더 현실적이고 가치 있는 실제 죽음으로써

이 죽음으로 죽어 있어야지만 예수가 이들에게 오실 때 자신들을 무덤에서 일으켜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들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출과 구원의 은혜보다, 자신들의 죽음으로 그 죄의 삯을 갚으려는 방법이

더 현실적이라 믿는 것이죠

 

하나님의 방법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 제사 중 4 가지 대표적인 제사들로 미리 전형된 제사들이

예수의 제사 행위들로써 영으로 전환된 영의 제사의 인도를 거부한 결과

그 생명을 주는 영의 법칙이 이들 신자들에게는 단절되는 경우를 의미 합니다.(8 2-3, 14) (베전46)  

 

이들 신자들은,,죽음의 거짓 세뇌 속에서 예수의 죄에 대해서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그래서 그 해방의 가치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세뇌의 맹신 속에서 예수 따로 믿고,, 죽음 따로 믿는,,, 수렁에 가친 격입니다.   

     

 

그러니,, 생명과 관련해서,,, 신자가 믿음의 법적인 실제적 교환 상황에 근접한 경우에,,

즉 그의 인생의 마지막 때 쯤 음에 맞닥 뜨렸을때,, 그들을 죽음에서 구출할 아무런 믿음의 에너지,,즉 생명의 영이 부재하기에

믿음의 법칙상 그들은 무덤의 긴 잠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 신자는 말씀의 증언들을 물리치고,,그의 믿음의 선택을

그의 얕은 지식으로만 의지해서 그 믿음의 결과인 무덤을 택한 것입니다.  

 

과연 어떤 종류의 죽음이,,, 하나님과 일을 벌여 논 사탄의 입장에서 보기에,,

사탄의 권세인 죽음을 상쇄할 더 실제적이고 가치 있는 죽음인지를

우리는 다시 한번 저울질 해봐야 한다는 뜻 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와 우리의 고리 관계 역할을 하는 예수 안으로의 침례란 또 뭐죠?

 

침례란, 기본적으로 잠기다 라는 뜻이겠죠.

그리고는 그 잠긴 상태에서 다시 나와야 그 잠김이라는 역할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물에 잠기던지 혹은 성령에 잠기던지,,

아니면 모세 안으로 잠기던지, 혹은 예수 안으로 잠기던지,,

그 잠기는 요소와 잠기게 하는 역할이,, 물질이든 사람이든,,

핵심은,, 잠겨지는 과정을 통해 그 무엇을 얻고져하는 목적에 있을 것입니다.

 

율법상, 제사용 그릇들이 물에 잠기는 이유는 그 물의 과정과 역할인,

1) 물 속으로의 잠김의 과정을 통한 깨끗함과

2) 잠김에서 나 온 후,, 그릇들의 역할인 거룩함으로 사용된다는,, 그릇들의 신성함을 얻고 져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안으로 잠겼던 이유는

1) 홍해의 바닷물 속으로의 죽는 듯한 잠기는 과정을 통해 

2)  모세의 역할인 완전한 구출인 탈 애굽과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얻는다는 개념 입니다.

 

예수가 성령에 잠겼던 이유는

1) 죽음에 잠기듯, 거룩한 성령의 과정 참여와

2) 성령의 역할인 그 죽음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하나가 되기 위해서였죠.

 

신자가 예수 안으로 침례를 받는 이유는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기 위한 문자적이자 종교적 관례인,, 초보적 개념이 아닌,(베전321,22)

1) 예수의 죄에 대해서 죽음이라는 물의 잠김으로써 상징되는 우리의 더러운 양심을 깨끗이 씻는 과정과

2) 성령의 역할로 나타나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선한 양심으로써의 새 생명의 시작 때문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침례란,, 그 양편을 다 하나로 묶어 놓는다는 개념인 것이죠.

 

그러므로 어느 신자가 정확히 예수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면,

그 신자는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인식한다는 것이겠죠.

예수와 같은 죽음으로 인식하여 십자가에서 같이 죽었다면,

예수가 아버지를 향해 죽음에서 일어난 과정처럼,,

이 신자에게도 죽음에서 일어나는 과정이 공 의롭고 필수적일 것입니다.

 

만약 형제가,,

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형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예수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인식으로 와 닿는 중이라면,,

,,일상적인 문자적 개인의 죽음과 문자적 부활만이 실제적이라고 형제의 정신에서 꽉 자리잡고 있다면,,

그래서 우리 신자와 하나로 묶어주는 로마서 6장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역할이란,,형제의 믿음 속에서는  가치적으로든, 권한적으로든  전혀 관련성이 없다 인식된다면,,

, 예수 안으로 침례 받는 과정을 거친 신자들에게 이 죽음의 침례 과정이란

그 져 하나의 종교적 관례쯤으로나 혹은 자신의 인생행로에서 단지 회개의 전환 포인트용 역활로뿐인

교리 메뉴쯤으로만 받아 드린다면,,   

 

이 로마서 6장 전체의 성경 말씀은,,

형제의 귀에 형제만 듣도록,,,,몰래 의심스런 누군가가 이렇게 속삭이는 중일 것입니다.

 

'형제여 !  거짓말 못하시는 하나님은 형제가 희망을 잃지 말라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이렇게 무리까지 하면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형제 개인에게까지 좀 과장해서 늘리고, 또 예수의 부활의 시간도

형제의 일생 중으로 팍팍 줄여서 그 의미만이라도 좀 맛보게 부풀려 놓았습니다.  

 

우선, 형제에게 듣기 좋으라고 말로만 뻥 치는 하나님의 이런 방식으로라도 위로를 삼으세요.

 

형제 개인과는 연결되지도 않는 예수 죽음의 늘려진 권세와 예수 부활의 가짜 희망을

하나님께서는 형제의 눈에 보기에 좋고 귀에 듣기에 좋으라고 예의상 희망으로 허락 하셨습니다.

 

그러니 로마서 6장 전체를 실제상으로는 받질 마시고 의미상으로만, 상징적으로 받으셔서

형제가 문자적으로 죽을 때까지만 견디고 많은 위로 삼으세요.

 

형제가 죽은 다음에는 무덤의 무의식 상태로 이어지기 때문에 형제에게는 더 이상의 아무것도

필요가 없기 때문 입니다. 그러니 무의식 무덤 속에서의 기다림의 지루함 이란 없을 것입니다.

 

형제가 죽으면 무덤 속의 긴 무의식 후,,깨어날 때는 마치 어제처럼,,곧 바로 부활인양 인식 되니까요. 무의식 무덤 덕이죠. '  라고요

 

 

혹시 이런 논리로 형제의 정신을 무덤으로 덮어 쒸워 놓고  사기성 위로의 목소리로

형제의 정신 속에서 외친다면,,

 

이 의심스런 소리의 출처는 말씀 위에 가라지를 뿌린 마귀의 쓰래기같은 소리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무의식 죽음 속에다,, 예수의 두 번째 나타남과 로마서 6장의 신자들의 기다림을 그곳에 숨겨놓고

그것을 산 희망, 산 소망 이라고 이름 지을 분이 아니시기 때문 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6 6절에서 이렇게 논리를 전개해 나 갑니다.

 

" 우리의 예전 자신이(old self)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목적은

육신의 죄를 destroyed 되기 위해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어떤 자든 죽었다면, 그는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로마서66(self 와 육신과 그리고 죄의 관계는 생략)

 

위 구절에서 육신의 죄, 혹은 우리 육신에 그 본거지를 둔 죄란, 우리 육신을 거머쥐고 있는 죄의 세력 이라고도 해두죠.

이 죄의 세력을 파괴하기 위해서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안으로의 침례란,, 신자들도 이 죽음과 같은 가치로, 같은 원리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으로 신자가 죽었다면,, 또한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처럼,, 같은 과정을 길로 경험해야 정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64절 끝 부분은 이렇게 결론짓죠

 

" 예수가 아버지의 영광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일어난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새 생명으로 살아 갈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 로마서 6장에 기술한 침례의 과정과 원리가

그대로 베드로의 글 가운데서도 중복 됩니다.

 

바로 베드로 전서 4 1-6절까지 인데요,,

1)육체의 고통(즉 죽음의 고통을 의미하죠)을 거친 신자들은

일단 죄에서 해방되고, 그 다음의 과정인

 

2) 새 생명으로써의 "다시 태어 남" 입니다.

 

 

이렇게,, 죽음과 그리고 그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일어남 이라는 마치,,

 

1) 태아 형성과,, 2)출산 과정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창조의 과정의 길로 이미 set up 된 것이기에 그의 후손들

역시 이 죽음새 생명으로 일어남 이라는 과정을 먼저 창조로 받으라는 것이죠.   

 

예수의 길 중에서 위치 상 새 생명이라는 이 시점의 가치가

골로새서 212-14절을 통해 다시 중복 됩니다. 바울의 논증인데요,,예수께 속하는

 

1) 죽음의 침례의 중복 입니다.(태아형성)

그리고 결정적으로 골로새서 31-4절에서 그 죽음에서 이제,

 

2) 제로 생명인,,새 생명으로 일어남(출산)을 통한 새 생명을 이야기 하면서

 

이 새 생명으로 계속 하늘 위의 일인 거룩함에 초점을 두고 걸을 때,,

4절에서 밝힌 것처럼 언젠가 예수의 두 번째 나타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인

+ 1 생명인,,영광의 구원의 생명으로 드러난다는 결론 입니다.(베드로전서 14,5)(히9장28절)(고전1장8,9절)

 

히브리서 9 27 28절의 1)죽음과 2)새 생명으로 일어남 과정이기도 하죠.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의 두 번째 드러남과 영광의 구원으로 그 길을 마침,,,베드로 전 19절과도 같은 과정이겠죠.

 

이러한 개념이,, 예수께 속하는 침례 속에 담긴 영의 인도 즉 영의 프로그램일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속에는 A) 태아 형성부분과     B) 출산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 집니다.

 

A)    태아 형성 부분은

죄에 대해서 죽는 일로(자궁의 말씀의 물로 씻어서 태어남) 형성 된다는 것이죠.

이 기간이 모든 사도들이 말하는 온 갓 시련의 때, 징계의 기간 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 육체의 약함이 모두 드러나는 실망이 그 극에 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신의 성품인 인내를 배울 것이며 잠에서 깨듯이,,깨어 날 것입니다.   

 

B)    출산 부분은 생명을 주는 영의 법을 통해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죠. (8:2)

       이 출산 부분은 거듭 태어 남으로 된 실제적 생명을 의미하는데요,, 역시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이 출산으로 0,제로, 새 생명을 얻었다면,이제 +1생명인 구원을 위해서

예수의 두 번째 나타남을 온 갓 선한 일과 거룩함 가운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928,  베전2,  818-24, 등등

     

2)     예수가 두 번째로 형제에게 나타났다면, 형제는 영광스럽게 된 것입니다.

즉 영의 첫 열매인 영원한 생명이 형제에게 주어진 것이며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작업인 영광스러운 작업을(희생의 번 제물로써) 위해 매우 거룩한 길을 가실 것입니다.

마치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길을 간 것과 같은 길일 것입니다.

형제는 죽음을 이긴 첫 열매인 것이죠.

 

 

형제가 첫 열매가 되기까지 온 이 길을 다시 조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피와 살로 예수의 자궁 안에서

1)형성되고, (물로 깨끗이)

 

2)출산되어 (영으로 새롭게)

 

a)    이제 자궁 밖으로 나 온 형제가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랑의 법의 실행의 길을 똑 같이 걸어서

      그와 같은 거룩한 희생에 참여하고

 

b)    결국 거룩한 번제물로써의 죽음인 예수의 죽음에 참여한 결과,,그의 영광의 부활에도 똑 같이 참여하여

     형제의 고향인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길은,,, 형제를 물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즉 자궁 속에서 새롭게 창조케 하는 영의 가치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궁 밖에서도 작용하여 영으로도 새롭게 테어나게 하는,,

그래서 형제로 하여금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이 거룩한 실제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마침내 완주할 수 있도록 작용할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가치는 자궁 안과 밖 모두의 길이 될 것입니다.

 

먼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능으로 형성되시고,

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길을 실제로 걸어 가시어 빛의 나라로 입성되기를 기도 합니다.  

 

 

맨 위 에베소 회중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 처럼,,

 

"잠자는 너, 이제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비추시리라"    에베소 514

 

 먼저,,,,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깨달음과

 

그리고 ,,,주님의 우렁찬  명령인,,, 

 "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깨서 빛을 비추시리라"  

라는 빛을 비추는 작업인 "GLORIFYING",,, 이 작업이 첫 열매인 형제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첫 열매들,,,

이들 첫 열매들은 이러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가치로,, 예수의 권한인 사망과 무덤의 열쇠로

먼저는 죽음에서 해방을 그리고 새 생명의 시작을,, 그 다음,,예수의 나나타심으로 거룩함의 길을 완주하고

마침내 영원한 구원의 생명으로 그 길의 끝인 빛으로 들어 갈 자들 입니다.

 

이들은 현재 시온 산에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는 많은  물소리를 내는 생명수들 입니다.

 

이들 첫 열매들은 죽음 속에서 그 영의 열매가 썩음을 볼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첫 열매이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이 많은 물소리 같은 하늘 물, 이 생명수를 흡수하는 생명 나무란 누구를,, 어떤 반열을 가르키며

이들이 죽음에서 일어나는 방법과 마지막 때란 어느 시기일까요?

과연 이 두 감람 나무 역활을 하는 나무 반열들이란 누구 일까요?

 

그리고 수정같이 맑은 불 타는 유리 바다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란?

그 숫자를 셀 수도 없이 허다한 흰옷입은 제사장 반열인 큰 무리들은요? 

 

그리고 누가 하늘 낙원의 영원한 왕 같은 자들이고,

누가 이 생명 나무에서 열리는 생명을 상징하는 열매을 따 먹고

그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 책에 기록 되어서 절기마다, 때 마다,, 

예루살렘 도시를 진주로 된 문을 통해 들어갈 까요?

 

그리고 또 누가 생명 나무 잎으로 치료를 받고 생명을 위해 하늘 낙원에 머무를 까요?

 

과연 예수 옆에서 죽은 믿음을 나타 낸 강도는 이 하늘 낙원에서 어떤 장소에 나타날 까요?   

 

이 모든 믿음의 층들이 차지하는 각각의 장소와 생명으로 일어남의 시기란 언제일까요? 

 

그리고 시온 후에,,,,신비스런 비밀의 도시인 예루살렘의 나타남,,,,,

그 거룩한 성 안에서 존재하는 산 돌들로써의 각각 장소들,,

1) 12 성벽의 비밀과

2) 그 12 성벽의 12 기초돌의 비밀, 

3) 그리고 거리와 12 문들의 비밀,,  

 

이 모든 장소와 믿음의 층들이 각각 예수 안에서 어떻게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고

어떻게 새 창조로 완성되는지 계속해서 길을 갈 것입니다. 

 

예수의 몸의 부피,,,그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과연 측정할 수 있을 까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의 길로 이 모든 예수의 부피를 살아있는 영들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

예수께서 지상 생애 중,,비록 자신 홀로 시작된 생명 나무와 그 열매와 자신의 말씀인 생명수와

자신 안으로의 문의 역활과 자신의 길들이,, 2,000 년이 지난 이제는 그의 후손으로 넓혀지고 길어지면서,,  

그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가치로 점 점 더 팽창에 팽창을 거듭하면서 생명나무와 열매와 문과 길을

그의 후손들에게 넘겨 주시는 방식으로  그의 팽창의 창조는 지금도 계속 커지고 높아지고 깊어지고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피인 예수의 몸 입니다.

 

 

*** 글이 너무 길어지는 이유로 위 나머지 믿음의 반열들의 일으킴은 따로 따로 올려야 겠내요***

 

the end,,, 

       

 

출처 : 어두운 예언
글쓴이 : 예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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