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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1/5

같은 공감의 영역에서 만난, 깃털처럼 가벼운 인연들과의 조우 ..

내 영혼이 우울해

무거웁게 보일지라도,

내가 바라는 바가 그런 무거움은 아니었다.

칙칙한 것 싫어하고 가두어지는 것 싫어하고 무게감을 견디지 못하던 나였으니까..

 

그러나 원치않게도

내가 전혀 원하지 않는 옷을 입게 되었고,

그 사실이 도리어 나로 진짜 우울하고 무거운 영혼처럼 살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 무거운 영역과는 전혀 별개의 영역에서의

깃털처럼 가벼움을 기뻐하던 나의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다..

 

두꺼운 알껍질을 타고난 탓이었다.

주변과의 교감과 소통의 '부재'가 바로 그 두꺼운 알껍질이었다.

 

알껍질 속에 나 ..

뜨거운 불 자체였다..

 

영혼을 흔드는 음악 속에 빠지면 

노래와 춤이 내 심장에서 바람 앞에 불꽃처럼 춤을 추며 일어나고..

눈알이 충혈될 것같은 의분 앞에서는 앞뒤 잴 것없는, 어느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불길이 일어나는 ..

 

맹수의 반사신경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런 나를 가두기에 충분했던 두꺼운 알껍질은

정말이지 완벽한 성벽이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내 안에 火氣는 그렇게 가두어져 있었다.

 

그런 나의 기운은

시공을 초월하여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일방적인 교감으로

기쁨의 춤을 미친듯이 추곤하였다.

그런 나는 현실 속에서는 부적응아였다.

해프닝의 연발이었다..  혼자 쓰는 동화의 연장선상에서 ..

그런 나는 수시로 촌스러움과 순진함과 어리석음의 극치를 달리곤 했다.

 

나의 영적 교감과 감성적 교감은 슬프게도

이미 생명의 온기를 오래 전에 잃어버린 것들과 가능했다.

이미 자연으로 돌아가, 하늘과 땅과 강과 바다와 들과 나무와 풀고 꽃과 물고기와 곤충들과 같은 자연과

이미 하나가 되어버린 영혼들 ..그들의 남겨진 숨결들 ..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그런 존재들이다.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래서 위로 받을 수 있었다.

난 그들의 뛰어난 이성과 같은 레벨로 끌어올려진 훌륭한 감성을 통해 

내 하늘 아버지로 드리워진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나기도 하였다..

 

 

토마스 만 .. 그의 단편소설 ' 베니스의 죽음'  

 

 

 

 

 

 

 

 

 

 

 

 

 

 

 

 

 

 

 

 

 

 

 

 

 

 

 

 

 

 

 

 

 

 

 

 

 

자기토대를 벗러난 심리는

사고의 소멸로 시작하고 

그 이상의 것을 얻기위한 노력은 이성의 존재를 부인하는것만이가능하다..

이처럼 본태를 추구하는것 보다는

자기내면의 초월이 모든것을 감싸고 회유시킨다

 

위의 표현은,  어떤 다른 목적으로 쓰여진 어느 익명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지만,

토마스 만이 다루고자 했던 영역에서 느꼈던 나의 개인적 생각을 구체화 시켜놓은 것 같아서

나의 표현 대신 옮겨놓은 것이다.

 

그 표현의 연장선상에서

자기내면에서의 초월은,

그 어떤 형태로든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는 정신세계 부인하고

그 세계를 박차고 나온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몫이며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이란 거대한 진리와 하나되는 같은 자연의 리듬의 첫발걸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진정한 믿음의 세계는,

자신이 모든 선악에 관한 판단의 중심이 되어 하나님처럼 군림하는

그 에너지의 세계를 해체하고 나와,

이땅에 단 하나의 진리이며 최고의 진실이 되시는

이땅에 만유의 주요 만유의 왕이신 우리들의 창조주 하나님 앞에

지극히 피조물다운 알몸의 모습으로 서는 그 시간

그 시점에서부터라야 진정 그 믿음의 세계가 시작될 것이란 생각이다.

그 믿음 속 실체가 바로 지극히 자연다운 자연의 작은 소산의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