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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들 /1

꽃나무 / 조동화

 

꽃나무 – 조동화

 

 


1
깊고 외진 골짜기에 나무 한 그루 서 있었다


처음은 작디작은 한 알의 씨앗이었던 것, 바람에 불리고

개울물에 쓸리다가 어느 날 문득 운명처럼 거기 뿌리 박았던 것……

그러나 누가 알랴ㅡ 먼 세월 말동무 하나 없이 살아온 나무의 외로움,

펼쳐든 하늘이 넓어갈수록 그의 깊은 가슴속에

화인 찍듯 겹겹이 생겨지는 동그라미들을,


봄이면 봄마다 저도 몰래 내쉬는 한숨들이 머리에서 발꿈치까지

환하게 피어나곤 했지만, 그는 미처 그것이 꽃인 줄을 몰랐다.


2
어느 화사한 아침이었다. 말할 수 없이 감미로우면서도 투명한 밀물 같은 것이

맞은쳔 등성이 너머로부터 밀려와서 나무의 온몸을 어루만져 준 것은,

그때서야 비로소 나무는 자신 말고도 등성이 너머 어디쯤

또 한그루 외로운 마누가 있었음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무작정 그리운 마음에 역시 제 가진 무형의 물살을 일구어, 만날 수 없는 그를,

스스로의 분신 같은 그의 온몸을 아득히 적셔 주었다


그것이 바로 향기라는 이름의 끈인줄을 모르고…


3
길길이 쌓인 눈 위를 삭풍이 마구 달리던 겨울이 가고, 나무의 가지마다 한숨아닌

그리움이 눈부시게 피어난 이른 봄날,


이심전심이었을까, 두 그루의 나무는 똑같이 서로 향기만을 적시던 일을 그만두고,

대산 모양도 빛깔도 가지가지의 작은 그림엽서들을 그려서는 바람결애 띄우기 시작했다,

아아, 세상에선 오직 그들만이 아는 오묘한 사랑의 언어들!

받고는 띄우고 띄우고는 기다리고……


그러나 그들은 또 그것이 나비라는 사실도 까맣게 몰랐다 

 

 



                                                        출처 조동화 시인 시집 <산성리에서>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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