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비가 오락가락 했다.
밤 9시 .. 복천동 언덕빼기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끈 채로 맘 편히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가로등 붉은 빛 사이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노라니
그 옛날 남산에 세워졌던 어린이회관 12층 미술부에 다니던 시절의 밤이 생각났다.
국민학교 4학년때 ..
문화적 혜택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살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딸이었던 나에게
어린이회관의 전 층은
나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로 열려진 문과도 같게 느껴졌다..
늘 깨끗한 공간 ..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미술의 다양한 부분을 접했었다.
조소도 조각도 회화도 ..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각자가 여러 색깔로 된 다양한 모양의 양초도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전날 나름의 작품을 제출하고 가면
다음 날 벽면이든지 아니면 둘러쳐진 선반에 이름과 함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말이 작품이지 나의 손의 흔적이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크게 잘 하고 못 하고가 별로 드러나질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 것만 눈에 들어왔으니까 ..
친구들의 작품은 함께 작품을 만들던 그 시간의 기억이 다 차버려
그들의 작품은 사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리들의 솜씨가 아주 큰 폭으로 차이나게 평가 받는 것이 그때는 이상스러웠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의 기억들 ..
어두워진 밤시간 .. 달리는 차들의 전조등과 미등을 빛 삼아
남산 순환도로를 따라 친구와 걸어오는 길에서의 추억 ..
검푸른 하늘에 가로등이 아주 운치가 있어 좋았던 적도 있고
친구가 오지 않아 혼자 걸어올 때면 무서워서 무작정 뛰어야만 했던 시간들..
어느날 수업 도중에
주변이 노래지면서 어지럽고 속이 미슥거리며
열이 갑자기 오른 날이 있었다.
수업을 겨우 마치고 나서
그날따라 에레베이터는 고장 나 있었고
친구는 12층의 계단을 날 업고 내려왔었다.
집에 오기까지 계속 업히기야 했겠는가 마는 ..
나보다는 훨신 등치가 있었던 친구 등에 업혀오면서
얼마나 고맙던지 너무 고마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 너 힘들겠다.."
"이젠 내려줘 !!.."란 말만 계속 했었던 것 같다.
그때 친구에 등에서 '나도 이런 친구가 되어 주어야지..'란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따뜻해지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친구는 아쉽게도 그 다음 해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 아이는 계속 미술을 전공한다는 소식을 나중에 전해 들었고 ..
아주 의젓하고 의리가 있고 가슴과 포부가 아주 큰 아이로 기억된다..
나는 혼자서 그 어둡고 위험한 길을 혼자 다닐 수 없어
할 수 없이 그 미술부를 그만 다녀야 했었다.
그곳에 연극부도 있어서 연극을 무척 하고 싶었었는데
내 바램이 우리 부모님에게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그때 좀 했으면 나에게 여러 모로 도움이 되었을 것 같기도 하여
안타깝기도 하다..
내성적이면서도 어떤 방법이든 감정표현이 자유로워야 하는 나에게
연극은 나에게 소통구가 될 수도 있었지 싶어서이다..
일 년 남짓 그곳에 다니면서
나에게는 그곳과 함께 한 감상적 파편과 기억들이 여러 방향으로 잠재되어 가라 앉아있다.
그 잠재되거나 가라앉은 기억의 파편들이
어쩌면 한지영이라는 영혼의 물고기에게는 어떤 특별한 형광색 비늘 몇 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 비늘 속에 묻혀 간혹 자기 색을 내는 그런 비늘 몇 편으로 ..
살아보니 인생에서는
아주 크고 넓은 길이 인생의 전체적인 틀을 이루지만
그리 많은 시간이 투자되지도 .. 굳이 어떤 굵은 선의 의미가 되지는 않더라도 ..
빛을 받으면 반짝거리는 브로치처럼 특별한 자기만의 색을 내게 하는
작은 기회의 시간들이 내는 작은 기억의 편린들도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무슨 행사가 있어 마지막 정리를 돕고 혼자 나오다가
어린이회관 1층 에레베이터 앞에서 보좌관들과 함께 서 계신 육영수 여사를 만난 적이 있다..
"추운데 장갑 끼고 나가지.."라며 보드랍고 따뜻하기 그지없던 육여사의 두 손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분을 스치듯 만나고 돌아서면서
그분이 얼마나 인자하고 품위가 있으시던지
"나도 커서 저런 품위있는 사람이 꼭 되어야지"라고 다짐하던 때가 있었다.
그분의 짧은 만남이 있어서 였는지,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난 정말 슬폈다.
늦가을 날..
친구가 오지 않아 혼자서 순환도로 길을 따라 집으로 오던 중
난생 처음 처참한 주검을 마주한 적이 있다.
경찰들이 서 있고 가마니로 덮어진 뭔가가 있어
무슨 일인가 싶어 호기심 많은 내가 참견해 보았더니 .. 누가 자살했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난 내가 죽고 난 다음의 상황에 관심이 많아졌다.
자살 ..
만일 내 죽은 모습을
다른 아이가 무서워 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더럽다고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쓴 채로 날 만지면 정말 자존심 상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차라리 죽으려면 아무도 모르는데 가서 죽어야 한다고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인지 난 지금도 난 내 죽음 이후에 무심할 수 없다..
죽음에 관한 아무런 생각이 들어있지 않은 자리에 처음으로 들어온 죽음에 관련된 사건이었으니
그때의 죽은 사람이 죽어서도 처참한 대접을 받는 그 사실이 너무 불쌍하게 생각되었던 까닭인 것 같다.
난 지금도 죽은 사람의 얼굴은 가급적 보아주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데 변함이 없다..
죽은 사람에게 화장을 시키는 직업도 있다고 하지만 .. 난 그 일에 아주 회의적이다.
그건 산 사람 좋자고 하는 일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에겐 그저 고왔던 모습을 마지막까지 기억에 담아주는 것이
가장 귀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그때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그 시절을 즐기고 있는데
씩씩한 우리 딸애가 그때의 시간 속으로 사정없이 뛰어 들어온다 ..
윗옷을 벗어 가방을 싸고 저는 맨 블라우스 차림에 비를 맞으면서 ..
다른 아이들은 가방으로 머리를 감싸고 나오는데 ..
차에 히터를 틀면서 그때 그 시절은 또 다시 과거로 돌아가버렸고..
나는 갑자기 35년 정도의 세월의 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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