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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1/5

어떤 인연

얼굴도 갸르스름한 것이

여고를 막 졸업한 소녀같았고

키도 몸도 갸날펐다.

하얗고 얇은 피부에 머리카락도 갈색으로 아주 가늘었다.

 

그러나 ..

그녀는 나보다 다섯 살 어린 나이였지만 

아주 당찼었다.

 

넓은 잔디와 높은 담을 가졌던 자신의 집이

아버지 친구의 배신으로 다른 이에게 넘어가고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반신불수가 되셨다 했다.

 

아버지의 건강이 하루 아침에 무너짐과 동시에

그동안 누리던 그 모든 것은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했다.

어떻게 어떻게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했다.

 

그 옛날 지은이 지연이 언니네처럼

그녀도 상고를 나와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받은 월급과 ..

집안 일도 남의 손의 도움을 받아오셨던 어머니의 어설프고 아픈

공장에서 번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집안을 이끌어가야 했었다 했다.

징그럽게 따라붙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려가면서 ..

 

아버지 돌아가신 날..

아버지 매일 누워 계시던 곳 장판 밑에

드시라고 건냈던 약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했다.

 

당신이 죽는 것이

온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라고 하며 눈물지었었다.

 

자기는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이

더 이상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인지 그녀는 매사에 겁이 없었다.

 

그녀와 나와는 어떤 개인적인 바램과는 관련없이

나와 가까운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고

그녀는 다섯 살이나 어린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윗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세상물정에 어둡고 여리기만 나에게

제법 가르쳐주려 하였고 

세상의 악함을 통해 자신은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며

자신의 슬픈 가정사를 모두 토해 놓았다.

 

그리고 순진한 나에게만큼은

사라져버리고 만 그 옛날의 화려한 기억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으로

그 지나간 영광의 후광을 여전히 누리고 싶어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무례하게 하는 이들에게

제법 날카로운 맞대응으로 스스로의 자리를 지나치도록 지켜나갔다.

 

스스로를 .. 이 땅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

마치 인생의 어떤 바람과도 싸워 이겨 낼 수 있는 오기로 똘똘뭉친 ..

그런 존재로 부풀렸었다.

 

난 그녀가 조금도 강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등골을 세워 표독스럽게 상대를 째려보는

신경질적이고 독기만 품고 있는 자그마한 야생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난 그녀에 관한 여러 말이 나올 때마다

그가 내밷었던 독한 말보다는  

그녀의 하얗고 보드라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더 먼저 떠올라

그녀에 관한 다른 뒷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 가까이에서 얻은 아들아이와 모시고 살던 친정어머니와 함께

어느 날 밤에 서울로 가는 탈것에 몸을 실어

우리 곁을 영영 떠나가버렸고

우린 처음대로 그렇게 남이 되고 말았다.

 

 

불안했었다.

그녀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세계보다 

돌아가고 싶었던 과거의 시간을 더 붙들고 살고 있는 것이 ..

그리고 ..

붙잡고 싶은 과거의 시간 만큼

과거의 인연들에게 너무도 친밀하게 결속되어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었다.  

 

명절 .. 명절 음식을 다 하고나면 수북히 쌓여있는 내 아이 기저귀들 ..

옆에 쌓아둔 그녀 아이의 귀저기는 거의 동량수준 ..

안하면 안했지 하면서 어찌 내것만 하겠는가..

허리가 휘어지도록 빨고 삶고 널고 나오면

그녀는 목욕을 가고 없었다.. 

 

속으로는 부글부글 올라오는 뭔가가 있어도

철두철미하게 발라진 나의 시멘트 외벽 밖으로는

낯색 변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여 ..

도량 넓은 사람처럼 조금도 내색않고

아무렇지도 않은듯

그렇게 위선을 입고 있었다.

그때는 ...

 

내 성향과 한계를 이미 알고 어느정도 이용할 줄도 알았던

이기적이고 영악하기까지 했었던 그녀였지만 ..

난 그녀를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린다.

 

모토에서 안정된 사랑을 더 받고

보다 성숙한 사랑으로 숙성되어야 할 시기에

너무도 모진 태풍을 맞아 숙성되지 못한채 떨어져버린 미숙과처럼

그녀는 본능 이상의 사랑에는 너무 설익어 있었다.

그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래.. 그렇다.

그녀는 태풍의 또하나의 분명한 희생자였다.

 

세상을 향한 분노 .. 두려움 .. 불신 ..

가난 .. 함께 고생한 가족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

절박함 .. 과잉 자기보호 .. 미움 .. 배타적 인간관계.. 

그 모든 것은 태풍이 훓고 지나간 자리에 자라난 독초였다.

 

난 그 당시 ..

그녀가 아이를 안고 얼르던 그 모습이 그대로 떠오른다.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

곱디 고운 스물 셋 나이의 어린 새댁으로 살아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녀 ..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늘따라 그녀의 얼굴이 바로 어제 만난 것처럼 

선명하게 다가오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비가 멈춘 아스팔트 위을 걸으면서

길가에 싱싱하다 못해 칼처럼 날을 세우고 있는 풀들의 위세가 ..

그 옛날 싱싱하지만 너무도 날을 세우고 있던 풀같고

독을 품은 야생동물 같던

인생에 불어닥친 잔인한 태풍에 속절없이 구겨지고 시들고 만 ..

기억속에 묻혀버린 한 곱고 애띤 얼굴 하나를 떠올리게 했을까?.. 

 

오늘 밤 .. 그녀를 위해 기도가 드리고 싶다.

그녀 심장의 중심에 계시던 그 고운 얼굴의 어머님은 안녕하실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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