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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1/5

나의 거울

이 블로그를 운영한지 벌써 이년 하고도 반 년이 되었다.

 

이젠 블로그가 내 일기장이 되기도 하고 ..

굳이 편지를 보내 내 뜻을 전할 가치까지는 없으나   

나의 진정을 알리고 싶을 때

혹여나 재수 좋으면 받아 볼 수 있는 허공에 띄우는 편지 정도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기로는

내 마음을 정리하여 하나님께 내 마음을 펼쳐 보이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또 그 보여지는 모습으로 깊은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잔잔한 평화를 얻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환경에 제 아무리 출렁거려도 변하지 않는 본래의 나의 내면의 모습을

보게 되어 때로는 안심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걱정스럽기도 하고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기도 때로는 내 한계를 완전히 인정하게 되어 무릎 꿇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떠한 색깔이든 잔잔한 내면의 소리와 하나가 되어 

진정 내 이름의 주인공으로 새롭게 태어나 호흡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면에서 영적인 진보와 함께 방법적으로 이 블로그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나에 대한 깊은 비밀이며 어쩌면 나란 존재에게 있어서 가장 부끄러운 고백이 될 것이지만 ..

난 오랫동안 나에 대한 정체성과 자중심을 갖지 못하고 살아왔었다.

 

나의 태생적 환경부터가 가부장적 제도와 관념에 확고히 사로잡힌 환경이지 않았던가..

내가 태어나 받은 이름이 정숙이었다.  한정숙..

나의 이름 하나는 오빠의 이름의 하나에서 .. 나머지 하나는 아버지의 이름 하나에서 빼내 지어진 이름..

내가 받았던 이름의 형성이 나의 환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자라면서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받고 살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

함께 살면서 사랑해 주신 것이지 ..

처음부터 나라는 한 생명에 존중과 의미와 개성에 관심을 가지셨던 것은 아니지 싶다.

난 단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한채 나의 독창적인 이름조차 받지 못했었다. 

 

내 사주?에 맞고 나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외할아버지를 통해서였다.

사랑이 많으셨던 외할아버지는 신년 운세를 보면 시집간 딸들 가족들의 운세까지 보아 

집집에 다 전하여 조심시키셨는데 ..   

그때마다 내 이름이 자주 화두에 올랐기에 

내가 중학교 들어가는 해에 뜻志 에 영리할怜 .. 韓 志怜 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살면서 감각적으로 조정된 것이 아니라 주입식 교육으로 바람직한 표현의 방법들이 주입되었고 ..

 

야생말 같았던 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평범한 여자들의 모습으로 서서히 길들여지면서..

태어나면서 가졌던 분명한 칼라를 필요한 자리에 나타내기보다 

물 흐르는 듯 주변과 같은 색을 내어 ..

있는듯 없는듯 자기 칼라가 없는 존재가 되어갔다.

 

그와 함께 나의 정체성과 나의 자중심은 싹이트지도 못하채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고 내 주변이 내 삶의 주인이 되었었다.

그리고 커서는 종교 교리가 또 내 삶의 주인이 되어버렸다.

 

늘 내 뒤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공허감은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늘 되지 못하고 살았던 당연한 결과였다고 슬프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 나에게는 공허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중심? 그거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세워졌다.

도저히 생길 것 같지 않았고 나의 격을 올리면 생기려나 했던 그 존재들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다른 곳에서 생겨졌다.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정상적인 사랑의 관계 안에서 나의 정체성이 뿌리 내리게 되었고 

그 관계안에서 자중심이 생겨난 것 같다.

그 자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에 나 개인의 독립적인 자중심이 아닌

어느 다른 자중심과도 화합할 수 있는 자연 친화적인 자중심이어서

자연 속 이로운 에너지로 존재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나의 정체성과 자중심은 내 하나님 안에서 찾은 것이기에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본다면 사랑이 그분의 속성이고 형태이고 뜻이기에

자연에 이로운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라 나름 생각하고 있다.

 

나의 이름은 내가 찾게 된 그 보물 위에서 안정되이 나를 표현하는 하나의 또 다른 표현이 되었다.

나의 이름이 이제서야 제 주인의 또 다른 표현이 되었다.

아주 오랜 시간 실제 주인 잃고 살아온 그 이름이 이제는 서럽지 않게 되었다.

 

블로그는 나의 내면의 거울이었고 나의 모습을 찾게 해 준 귀한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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