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때때로 힘들다.
그것은 내 안에 서로 다른 나의 여러 목소리가 있어서 이다.
난 그것을 보고 '내 안에 내가 또 있어서'라고 표현한다.
나의 한계를 빤히 알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계속 목소리를 내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꼭 감성없는 알람시계를 닮았다.
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서양적 사고방식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나타나는 모든 현상의 뿌리를 다루고 있는
동양적 사고방식이 서양적 사고방식보다 한 발 더 앞선 사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난 동양적 사고방식을 선호하고 또 그 방법에 내 삶은 익숙해져 있다.
난 어떤 일이든지 동기를 중요시하기에 그것을 항상 잊지 않으려 하는 편이다.
넓은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방법이 수 없이 많은 것처럼
우리가 살면서 선택할 방법은 부지기수로 많다.
지혜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 혹은 외부적이든지 내부적인 이유에 의해서 ..
가로질러 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소요되는 시간과 그 능률에는 관한 사실에는 난 별로 연연해 하질 않는다.
동기만 분명하면 흐르는 시간 그 어느 때인가에는 도착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그 사실만 중요하면 그것만 이루면 되니까 말이다.
또..
설사 약속시간이 지나 내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일에 신경질은 낼지라도 화가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방법이나 과정의 변수적인 면이 아닌
그 일을 이루는 진정성인 내면의 마음을 살피는데 있어서는 난 아주 까다롭게 구는 편이다.
까다롭게 구는 형태가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는 나도 사실 잘 모르지만..
난 사람의 관계에서는 마음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그러나 이런 나의 모습은 지극히 주관적으로 흐를 수 있어
무리수를 둘 수 있는 가능성의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그것에도 곧..그리 당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래서 내가 터뜨리는 화의 내면에는 에너지가 충실하지 못한 편이다.
결국 상대방의 그 무심한 사실은 나에게 상처만 남겨주는 꼴이 되고
나의 화내는 표현이란 실지로 알고보면
내 상처의 통증으로 인한 나의 몸부림같은 것 임을 나는 안다.
내가 중요시 여기는 것은 형체가 없는 것이기에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지나간 바람을 잡으려는
몽상가로 비쳐지기도 하고..
때로는 바쁘게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들의 맞물림에 그대로 튕겨나가는 서러움을 겪기도 한다.
일을 처리하는 것에서는 목적과 원칙을 중요시 여기고
사람에 관련해서는 능력보다는 순수성과 진정성에 무게를 많이 두기에..
결과를 요하는 사람이 엮인 일을 접할 때면 난 결국 아주 어리석은 사람의 꼴이 되고 만다.
요즈음엔 그것도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로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내 안의 나는 계속 ..
사람이 엮인 일에서도 합리적인 일 처리를 위해서는
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알람소리를 계속 내며 나를 괴롭힌다.
스윗치를 눌러도 꺼지지 않고 계속..
어쩌면 꺼지지 않고 계속 울리는 그 알람소리는 나의 삶의 애착.. 본능의 절규일까?
모르겠다. 정말..
난 아직도 미숙아요.. 미숙과 임이 틀림없다.
나보고 철들었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헛것을 본 것이 틀림없다..
내 몸은 가을 속에 머물고 있지만
정신 연령은 아직 한 여름의 뜨거운 햇볕에 성숙되어가야 하는 과정에 머물고 있단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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