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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1/나의 일상

무지개빛 추억

딸애를 등교시키고 차를 돌리고 나오다가..

아침 해를 등지고 나란히 걸어오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의 거리를 계속 유지한 채..

살포시 웃는 웃음과 긴장하고 있는 것이 느껴질 정도의 조심스런 발걸음의 여고생 옆엔 

대학생으로 보이는 듯한 남학생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남매는 분명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거슬러 그때의 아침으로 돌아갔다.

차창 밖으로 아침의 붉은 해의 기운과 화사한 봄 햇살이 아득한 그 길의 배경이 되어 주었다.

 

사춘기 시절..

나에게 떨리는 가슴과 수줍은 미소를 처음 가지게 하였던 이는 .. 우리집 가정교사였다. 

그 당시 우리집에 가정교사가 있었던 것은

우리집이 부유해서라기보다 부모님의 교육에 대한 열성 때문이었다.

 

그는 최고라 불리우는 대학 의과생이었다.

자신이 해야 할 공부도 늘 많았는지 새벽녁까지 그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그의 방은 늘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책상에 꽂힌 책이며 필기구들도 하나하나 살아 있는듯 생동감 드는 것이

꼭 아버지 책상과 같았다.

그는 오빠와 같은 방을 썼는데..

그가 들어온 날부터 오빠 방은 아예 다른 사람의 방처럼 달라졌다.

흐트러짐 없는 생활과 지적인 조용한 성격은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어쩌다가 시간이 맞으면

등교하는 나와 나란히 이십 분 정도의 길을 함께 걸었다.

오늘 아침에 스쳤던 그들처럼..

여름이면 무성한 푸른 잎을 가졌다가..

가을이면 노란 잎으로 한껏 분위기를 내고 떨어지는 그 길을 함께 걸었다.

 

그와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한 집에서 자고 같은 밥상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

아침에 세수하여 젖은 얼굴로 맞닥드리기도.. 

잠옷 입은 차림으로 화장실 앞에서 마주치든지..

하지만 일상의 그 생활로 ..

나는 그와 그리 먼 사람이 아니라는 착각을 하기에 충분했다.

 

말 수가 별로 없었던 그가 나에게 이야기를 꺼낼 때에는 주로 책 이야기를 하였다.

그 책 읽어 보았느냐? 그 주인공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런 정도였다.

그는 쉽게 이야기 했을련지는 모르겠지만 .. 내가 읽지 않은 책이름이 나오면 난 그 책을 꼭 사 보았다.

그리고 그가 물었던 주인공에 대한 생각을 숙제처럼 혼자 해 보았다.

 

학교에 도착해 시끌벅적한 교실에 도착하면 잠시 전의 세상과 다른 세상에 들어온듯 했다.

솔직히 선계에서 속세로 내려온 느낌이었다.

 

이성에 관심이 많던 시절..

내 친구들의 등교할 때 늘 만나는 남학생 이야기든지..

학원에서 자기를 자꾸 쳐다보는 아이 이야기든지.. 자랑같이 떠들어 대면..

난 속으로 웃었다. '뭐 그런 걸 같구~ 그리 호들갑 떠냐?'라는듯이..    

 

한 일 년을 집에서 함께 지내다가 그는 떠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공부 양이 너무 많아져 아이 가르칠 시간을 빼기가 힘들 것 같다고..

그는 그렇게 떠났다.

 

사실 그와 함께한 그 어떠한 일도 없이..

한 집에서 머문다는 그 이유만으로 많이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그가 감명깊게 읽었던 책을 바로 옆 방에서 읽고 그 책의 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많이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었으나..

그의 발걸음이 그리 쉬웠던만큼 우리 사이엔 아무 것도 없었다.

 

한동안 그가 없는 우리집이 텅 빈 것 같게 느껴졌다.

그 텅 빈 것 같은 것이 현실로 와닿게 되는 날부터 내 기억에 무지개가 새겨졌다.

 

신기한 것은 ..

내가 비웃었던 내 친구들의 가벼운 인연들은 가벼운 웃음으로 여전히 머물고 있었다.

 

내 사랑은 늘 그렇게 혼자 쓰는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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