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저는 정말 외로운 나그네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야 곳을 모른채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그대로 가족을 이끌고 자신의 생활기반을 정리하여 무조건 떠났지만..
저는 아버지의 명령도 듣지 못하고
인도하심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착각이었다 생각도 하면서
그때 그때마다 나름대로 최선의 길이라 생각되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당장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는 몰라도
저의 종착지는 아버지 앞이라는 그 답만 가지고서..
제가 가고자 하는 그 종착지는 저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변할 수 없는 표현의 장소이고
그 장소는 나의 주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간절한 갈망의 장소였지요.
믿음의 바다에서 저는 고아로 태어나 고아로 자랐지요.
제가 고아의 심정을 느껴본 것은 어릴적 제가 태어난 믿음의 바다에서였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밖의 존재로 ..
꼭 돈까스 만들 때의 빵가루 같았다는 느낌이 그때의 느낌이었습니다.
분명 돈까스를 만들때 빵가루는 필요하나 떨어져 나가는 빵가루는 언제나 존재하듯..
그 떨어져 나가는 빵가루를 아까워 하기보다는 살코기에 꼭 붙어있는 빵가루들이 많이 있기에
차라리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사실.. 저는 그런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궁굼하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야기가 저에겐 적잖은 충격으로 와닿아
그 사실이 꼭 돈까스 빵가루 취급을 받는 그런 기분을 이기고
일요일 아침마다 새는 연기처럼 집을 빠져나와 교회로 뛰게 만들었지요.
어쩌면 고아였기에 믿음의 바다 곳곳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여행에서 거대한 산맥에 가두어져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상하로만 헤엄을 치던 저는..
그 헤엄법에 금방 길들여져갔지요.
그러나 믿음의 길에서도 저 안 깊숙히 있는 또 다른 저는
그 생활에 길들여져 점점 생명력 잃어가는 저의 그 믿음의 형태를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를 여러번..
그러면서 바닷속 여행에서 어떤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거대한 산맥마다 하나님께 속한 이야기들이 다 달랐다는 것입니다.
여러번 여러번 그것을 느끼면서 제 나름대로 생각하게 된 것은 다름아닌 그 산맥 위의 바다에서야말로
가두어지지 않은 진짜 바다의 소리와 냄새를 직접 느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여행 끝에 저는 처음 바다에 태어났을 때처럼 그때의 마음으로
산맥과 산맥 사이에서 울리는 소리가 아닌 자연에 의한 해류에 의한 소리를 들으며
저의 물고기 본능대로 위아래로의 헤엄이 아닌 해류를 따라가는 앞으로의 헤엄으로
처음 믿음의 바다에서 태어났던 그때 가졌던 목적지를 향해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바닷속 높은 산맥 속에 가둬지지 않는 믿음의 바다에서의 자유로운 여행입니다.
매일 앞으로 나아가면서 가끔씩 바닷속 거대한 산맥들의 지류를 스칩니다.
그곳에 가두어진 믿음의 훌륭한 물고기들을 보면서 소리를 질러 봅니다.
그 산맥 위로 올라 오라고요.
그 산맥에 가두어진 바다의 세상도 물론 믿음의 바다속이지만..
전체 바다에서보면 고여있는 장소여서
갓 태어난 아가 물고기들은 그곳에서 양육받아 자라야겠지만..
점점 자라서 자신의 본 고향을 찾아가는 물고기들이라면 그 산맥을 넘어
진짜 바다속 해류를 따라하는 바다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고요.
아버지! 저는 요즈음 새로운 산과 강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 산맥과 강들은 이제껏 보았던 산맥들과 강들과는 달랐습니다.
그것들은 사상과 관념의 것들이었습니다.
물질적인 산맥과 강들보다 더 높고 더 깊은 강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산맥들과 강들에서 초월한 물고기들마저
그 거대한 산맥과 강들에서 자유롭게 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았습니다.
요즈음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시온앞에 놓여진 돌은 바로,
믿음에 의해서 태어나지 않은..
지극히 인간적인 열심으로 쌓아올린 바벨탑같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적 사상과 관념들이 내어 놓은 존재들일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제가 본 것들이 사실들이라면.. 사실이라면..
그 걸려넘어지게 하는 돌들을 넘을 시온의 백성들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겠지요.
저는 미지의 그들이 보고 싶습니다. 그들이 그립습니다.
볼 수 없는 아버지와 우리 주님이 그리운만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