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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1/5

허상을 향한 헛된 논쟁

살면 살수록 우리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말처럼 소중한 것도 없고

말처럼 우리 생각과 감정의 발목을 잡는 물귀신같은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말은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는 자신들의 마음을 전달하는 아름다운 도구가 되지만,

따지고 선을 그어 한계를 지으려는 용도로 사용될 때는 

무식하기 짝이없는 도끼와도 같은 도구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두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인가 아닌가를 고민하는 형제들의 토론을 보면

언어의 표현 속에 가두어진 하나님의 모습에 답답함이 몰려옵니다. 

 

저 역시 그 토론에서 오랫동안 자유롭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삼위일체란 주장 쪽에서.. 다른 한 번은 우습게도 반대편에 속해 있었지요. 

 

이제는 그 논제 자체에 그 어떠한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도리어 무소부재하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우리 인간들의 사상 속에 가둔다는 그 사실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 다가가는 방법적인 면에서 

우리가 그 분이 어떤 분이라고 판단하고 단정짖고 다가가기 보다,

그분께서 우리 피조물들에게 베푸신 사랑의 흔적들을 찾아 가는 모습으로 다가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모습을 단정짓고 성경 말씀을 읽고 이해하게 된다면

어떤 점에 컴퍼스의 중심을 두고 돌리는 것처럼 인위적인 한계가 그어지게 될 것이니까요.   

 

우리가 어떤 존재를 단정지어 표현하려면 적어도 그 존재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세상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단정적으로 표현하려는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성서 여러부분에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이루는 면에서 하나이신 것이나, 아버지의 사랑안에 하나되신 일에서나,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 면에서 그분과 하나 였음의 표현은 달리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처음 배웠을 때부터 지금까지를 돌이켜 볼 때,

차라리 삼위일체의 이론이 없었다면

좀 더 아버지 하나님께 다가가기가 더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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