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어릴 적 기억들이 더 선명히 떠오르니 말이다.
어머니가 우리 삼남매를 데리고 무작정 신촌에 있는 아버지의 하숙집으로 올라 오시면서 우리 가족의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얼마 안 있어 아버지의 회사가 가까운 후암동으로 이사 옴으로 서울 생활 거의 대부분을 그 동네에서
살게 되었다.
지금 가보면 지금도 넓게 느껴질련 지는 모르겠지만, 발목에 걸어 뱅글뱅글 돌리는 종이 달린 장난감을
이리저리 돌며 다녀도 조금도 비좁지 않았던 넓은 마당도 있었고,
우리 닭이 늘 알을 낳던 대청마루 밑은 한참을 기어들어가야 했을 정도로 넓은 대청마루가 있던
집이었다.
우리 대문 맞은 편에는 아담한 양옥집이 있었다.
그 집에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쌍둥이 언니와 얼굴이 하얗고 뼈대가 가느다란 곱슬머리 남자 동생이
살고 있었다.
그 집은 그 당시로는 아주 부유했었다.
우리 집은 그냥 휑하니 넓은 마당에 장독대 올라가는 계단이 내 눈에 특별하다면 특별한 것이었는데
그 집은 그리 넓지 않지만 등나무가 마당 앞에 쳐져있어서 햇빛도 막아주고
마당 쪽에는 초록색 풀들과꽃도 있었던 것 같다.
그것보다는 그 마당에 그네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부러운 것이었다.
양쪽으로 앉아 탈 수 있는 그네였는데 정말이지 환상적이었다.
다섯 살 나이 어린 내 눈엔 그토록 화려하고 신기한 것이 많은 집은 처음이었다.
우리 집엔 아버지가 치시던 풍금이 있었는데 그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우리 집의 오래된 풍금에서 나는 소리와는 딴 판이었다.
그래서 난 그 언니 집에 어떻하면 한 번 더 가보나 싶어 늘 우리 집 대문 계단 앞에 앉아 있곤 했다.
한 번은 우리집 대문 앞에 앉아서 '지연이 언니야 노올~자!" 며 언니를 부르니
반갑게도 언니가 나왔는데 이내 언니 엄마가 따라나오시며
"촌뜨기 하고 놀지 마!"하며 언니를 데리고 들어가셨고 시장 다녀오시던 내 어머니 그 광경을
목격하시곤
"되먹지 못한 여편네!"라며 거칠게 내 손을 낚아 채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셔선 그 집으로의 금족령을
내리셨다.
자존심이란 것을 몰랐던 나로서는 아쉽기만 하였다.
세상살이가 세옹지마라 하였던가.
우리 아버지가 그토록 뿌듯해 하시던 빨간 벽돌 이층집의 이층을 세를 놓으려고 내어 놓았던 집에
세를 들려고 복덕방 할아버지와 함께 오신 분은 다름아닌 앞집 지은이 언니 어머니셨다.
내 어머니는 별로 내켜하지 않아 하셨지만 우리 아버지께서 흔쾌히 수락하시면서
그 쌍둥이 언니들과 한집에서 살게 되었다.
한 삼 사 년은 함께 살았던 것 같다.
자면서 훔쳐들은 이야기로는 아저씨가 어떠한 일로 미군부대를 나오게 되셨고 아줌마는 노이로제 증상으로 아주 예민하게 되었고 아저씨가 바람을 피워 집에도 자주 들어오지 않아 집이 엉망으로 내려 앉았다는 정도였다. 이층에서는 간간이 심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
그런 여름 날이면 쌍둥이 언니 둘은 옥상으로 잠을 자러 올라가서는, 둘만 자기가 무서웠던지
내려와 꼭 나를 부르곤 했다.
옥상에다 돗자리를 깔고 얇은 이불을 깔고 덮고 하늘을 보며 누우면 우리는 다른 세상에 온 듯 했다.
셋이서 이리저리 뒹굴뒹굴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하늘에 떠있는 별을 보며 누워있으면
정말이지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독특한 즐거움과 행복함이 머물렀다.
씻고 잠옷까지 입었으니 시원하다 못해 썰렁하기까지한 바람에 피부가 까실까실 한 것이
에어컨 없던 시절 그런 느껴보기 힘든 상쾌함이 좋았던 기억이 함께 난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고 언니는 중학교 일 학년 때 쯤이었다.
조숙한 승희 언니는 한 번씩 미래의 신랑감 이야기를 꺼내어, 사춘기 아주 아주 시작의 설레임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자기 등쪽의 얼룩점을 보여주며 "우리 할머니가 그러는데 ... 몸에 이런 점이 있으면 좋은 남편 만난대!"
"정말? 그럼 나한테도 그런 점이 있나 봐봐 ! " 하며 내 옷을 들춰주면
"어디 보자. 우와~ 넌 옆구리에 두 개나 있네!"
"진짜? 어디 어디..."
진짜 좋은 남편을 만날 약속을 하나님께 받아내기라도 한 듯이 좋아라 했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고
새벽 이슬이 내려 오슬오슬 추울 때 쯤이 되면 비몽사몽 간에 서로 흔들어 깨워
각자의 집으로 숨어들듯이 들어와 잠이 들었다.
.....
언니 집엔 점점 더 암울함이 짙어져 언니 집은 우리 이층 집에 사는 것도 버거워져 이사가게 되었고
들리는 소문으로는 아줌마가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만 희미하게나마 전해 듣게 되었다.
지연이 언니는 감수성이 좋아 말을 잘 하여 나랑 죽이 잘 맞았고,
승희 언니는 조숙한 듯 말 수는 없지만 듬직하여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던 언니였다.
난 말은 지연이 언니하고 더 많이 하였지만 속 마음은 승희 언니가 더 편하고 좋았다.
보고 싶은 언니들... 우리들의 수다와 웃음소리... 우리들의 설레이던 미래...
그 세월 속으로 들어가니 내 아버지도 그 젊던 내 어머니도 우리 개 루비도 ...
기억 속에서 하나하나 살아난다.
모두 모두 살아난다.
너무도 그리운 얼굴들이 다 살아 나온다.
기분은 좋은데 ... 눈물은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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