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들 /담아온 글 ...

예배

교회개혁포럼 카페에 올려진

iDeaRush님의 글에 공감하여 옮겨왔습니다.




예배하는 자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예배 문제는 믿는이들의 최대 관심거리요 의문에 쌓인 행위다. 기실 예배는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행해지는'(acting) 것임을 성경이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흔히 예배를 드린다고 표현한다(대상을 하나님이라고 한정하기 때문).

 

드린다는 것은 종교적 느낌을 강하게 내포하는 수사다. 구약 제사와 신약 예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었일까? 구약에는 성령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므로 직접 하나님을 뵐 수 없었기에 제사장이 그 대리 업무를 맡았다. 그러므로 구약 제사는 제사장이 있는 성막에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구약 제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예배는 완전히 달라진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게 된다. 이것은 예배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요한복음 423절에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고 하고 있는데, 영어 원문을 보면 seeketh로 되어있고 '하나님에 의해 발견되게 된다' 정도의 의미다.

 

현대적 종교의식 형태의 예배가 자리잡게 된 배경의 성경적 연원은 없다. 물론 성찬 의식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성찬의식과 의식 예배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둘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굳이 개신교의 종교의식 예배에 대한 연원을 찾는다면 카토릭의 미사를 변형한 것에 대해 부정할 수 없다. 같은 요일 비슷한 형식으로 치뤄지며 이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예배'로 지칭하고 한정해 왔었다.

 

예수님의 예배에 대한 언급은 사역속에서 단 1회에 그친다. 그 예배에 대한 선언은 요한복음 4장 속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예수님의 사역은 그 연장선에 있다. 예수님이 신약시대의 대표적인 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는 그 중보적 역할을 의미함도 있겠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삶이 곧 제사장의 삶이요 예배의 삶이었음을 이해해야 할것이다.

 

, 그분의 사역 자체가 예배인 것이다. 일찌기 나의 스승께서 이 요한복음 4장에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여자와의 문답에 대해 이야기하며 신약적 예배의 패러다임을 말했었때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예배당에서 시간을 정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해 왔고 그것에 얽매여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며 실제 행해야할 참 예배에 대하여 둔감하게 살아왔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깨우치게 된 일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예배당의 종교의식을 그치게 되었다. 진리로 자유하게 되었으며 참예배로 회귀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예배가 아니라 내 스스로가 제사장적 삶을 통해 이웃을 섬기며 사랑하고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될 때,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을 찾는다는 의미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미 인터넷에는 많이 회자되고 있지만, 아마도 기억속에는 12~3년전이 된 것 같은데 스승께서 본인이 예배당 예배를 그친 이유를 설명하며 요한복음 4장 속에서 구약 제사와 신약예배의 패러다임을 비교하고 예배의 특정 공간적 제한을 벗어난다(예루살렘의 성전도 아니요 그리심산의 산당도 아니다) 예배는 구원의 방편인데 이는 제물로 드려진 예수 자신이며(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 내가 곧 메시야다) 영적으로 예배하는 때가 되었는데 이는 로마서121절의 곧 '우리 몸이 거룩하게 삶 속에서 이웃을 위해 제물로 바쳐지게 됨'을 의미한다라고 깨닫게 해주셨다.

 

실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참 예배로의 회귀를 경험하게 된 시점이니 귀하고 귀한 가르침의 시간이었다. 예배당 예배를 그치면 어떻게 될까? 그같은 변화가 나의 삶에 어떤 변화를 줄까에 대해 적지 않은 망설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 안에서 누리는 참 안식은 종교의식 행위로는 완성을 볼 수 없는데 이는 이웃과 함께 울고 웃으며 인간 사회회복에(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 창조의 원형) 스스로가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있다는 작은 깨달음이 오히려 참 본분의 시작이요 끝임을 깨닫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방탕해 지지도 않았으며, 바리새인처럼 행동하는 일도 없게 되었다.

 

예배당이라는 한정적 공간에서 벌어지던 의문의 예배에서 풀려나 언제 어느때나 내가 acting 하는 현장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는 기쁨은 결코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그리스도인과 가나안 교인들이 이 예배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함은 안타까운 일이다. 종교의식을 강화하면 이웃사랑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다.

 

종교의식 예배의 강화는 이웃사랑을 외면하는 가인의 예배와 많이 흡사하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중요시 했지만 형제 아벨과의 관계는 가치부여를 하지 않게되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러한 측면을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 함이니라(이사야서 1:15) 이는 우리가 예배당을 찾아 하나님과의 관계만 소중히 하려는 일면을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 이사야의 이 지적은 마태복음 25장의 예수님의 지적과 일맥 상통하다.

 

우리의 이웃이 죽어 나자빠져도, 위기에 빠져도, 병들어도, 헐벗어도, 나그네로 추위에 떨어도, 감옥에서 억울한 시간을 보내도 하나님과의 관계만 소중히 여기는 측면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참예배의 시대가 열렸지만 그것을 깨닫는 이는 받아들이는 것이고 의문의 제사를 거듭하는 이는 오직 그것에만 가치부여를 할 뿐이다.

 


'흔적들 > 담아온 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문을 두드리며 - 이성선   (0) 2019.10.17
아름다운 찬송  (0) 2018.07.02
죄( 보충)  (0) 2016.07.06
"생명을 주는 것은 영입니다."  (0) 2016.06.27
생명나무 2  (0) 2016.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