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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들 /담아온 글 ...

[스크랩] 그리스도인과 십일조

만일 어떤 교인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기쁜 마음으로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기로 작정하고 자진해서 바쳤다면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가 십분의  일을 바쳤지만  그것은 보통의 헌금이지 구약의 모세 율법에서 명한 십일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구약의 율법에 근거해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 라는, 설교를 듣고 그 설교에 따라 <십분의 일>을 의무적으로 바쳤다면, 그것은 모세율법ㅇ에서 명한 율법적 행위가 된다. 이 둘은 똑같이 10분의 1을 냈지만, 하나는 자유로운 보통 헌금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주의적인 십일조다. 이 둘은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여기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구약의 -예를 들면  <레위기>와 <신명기> 특히 <말라기> 에 따른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십일조다. 이제 성경을 통해서 <십일조 헌금>의 정당성 여부를 규명코자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구약의 율법> 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으므로 율법에서 명한 십일조를 바칠 아무런 의무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 그리고 Luther 나 Calvin에 의한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일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의 유럽과  북미의 전통이 있는 주요 개신교회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십일조를 강요함으로서 많은 폐단이 생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폐단을 열거하면 1)교인들에 너무 많은 물질적인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2)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얻은 자유>를 빼앗고 정신적 부담을 주며  3) 교인을  율법과  기복종교의 단계에 머물게 하고  4) <교인들의 신앙성장>에 정신적 성숙을  저해 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기독교 자체의 변질을 초래>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원래 구약시대 때 성전에서 섬기던 제사장과 회막(Tent of Meeting) 에서 봉사하던 레위인의 생계를 위해서 모세의 율법으로 제정된 것이다(민 18:21)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이 드리던 <동물제사 제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류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침으로서 폐지 되었다.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려 완전한 제사를 드렸으므로 이제는 <동물제사>도 <제사장>도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내용이다.(히9:11-12,10:8-9)

 

'제사 직분이 변역 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혁한다(히7:12)'는 말씀과 같ㅣ <그리스도의 속죄제사> 이후 <옛 언약과 모세의 율법>은 폐지 되고 더 좋은 <새 언약과 새 법>이 들어 섰다는 것이다. 히(7:18, 8:6~8, 13)      없어졌다기보다는 더 좋은 것으로 대체되고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세의 율벌>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다는 것이 구약과 신약의 중요한 차별적 내용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은  십일조이건 할례이건 모세의 율법에 속한 법은  지켜야 할 아무런 이유나  의무도 없는 것이다. 또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율법을 비롯해서 613 조문이나 되는 모세의 율법은 그리스도인게게는 직접 적용되지도 않고 이행해야 할 의무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의 중심사상이다.

만일 어떤 목회자가 그리스도인도 십일조에 관하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의문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에 의해서 시작된 초대교회가 구약의 십일조법을 지켰다는 증거가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없고  사도들도 그것을 가르치지도 안했을 뿐 아니라  언급조차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둘째: <예수님이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갈 4:5)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갈5:1, 2:4) 고 하셨을때 그것은 구약에 있는 '모세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 만일 구약에 있는 십일조에 관한 율법을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한다면 613개 조문이나  되는 다른 모든 율법도 지켜야지 (갈 3:10) 그 법의 한 두 개만 골라서 지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령 예를들어 어느 한 집단의 국민이 국가의 많은 법 가운데서  자기들 마음에 드는 법, 몇개만  골라 지키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해 버린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되지 않겠는가?

 

넷째: 만일 어떤 교회에서 십일조에 관한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 법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완전하게 지켜야지  그 법의 절반만 지키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무시해 버리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구약의 십일조 법은  성전과 회막에서  봉사하는 자들의 '생계를 위한 십일조'일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구제의 십일조'도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신 14:28~29, 26:12)  그런데 그 법의 절반만 지키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무시해버리는 것은 독단이며 모순이 아닌가?

 

유럽과 북미의 큰  교파들은 십일조를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십일조의 율법을 기어이 지키기를 원한다면 할례와 안식일에 관한 율법도 지켜야 할 것이다 안식일은 일요일이 아니고 토요일이다. 사도 시대 이후 안식교회를 제외한 모든 기독교는 십계명 가운데 제4계명인 안식일에 관한 계명을 지키지 않았으며(골 2:16) 대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한 일요일을 집회와 예배의 날로 지켰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십계명중 하나였으며 '영원한 언약' 이라고 까지 하였지만 (출31:16) 십일조는  십계명 가운데도 들지 않는 사소한 법이었다.

그리스도의 헌금은'십일조의 율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부터 복음전파의 사명을 받은 교회가 '선교활동'을 계속하고 '빈민구제'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이므로 구약의 십일조와는 본질적으로 그 성격이 다르다. 사도시대에서의 교회헌금은 주로 빈민구제를 위한 것이었다(고전 16:1-4)

 

그러면 예수는 십일조에 대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성서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예수는 평생동안  십일조에 대해 꼭 두 번 언급한 바 있다.

 

그 첫째는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바치면서  자기를 남보다 의롭다고  믿고있는 바리새인의 독선과 교만을  책망하면서 언급하였다.(눅 18:9-14)

또 한 번은 역시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와 위선을 맹렬히 공격하면서 언급하였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율법의 더 중한 바 (율법의 정신) 의와 인과 신의는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마 23:23-24) 라고 책망할 때 였다.

다시 말하면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율법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로서 '약대' 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십일조'바치는 것은 지업적인 문제로서  '하루살이' 정도의 비중밖에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의 본질적인 내용인 '정의와 자비'보다는 지엽적인 사소한 문제인 '십일조'를 더 강조하는 것은 어리석고 위선적이며  눈이 먼 지도자가 하는 짓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주목할점은 하루 동안 살다가  없어지는 하루살이 정도의 비중밖에 되지 않는 '십일조'라 할지라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근거해서  어떤사람은 예수도 십일조를 명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올바로 판독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오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1)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새 언약'  -눅22:20- 과 '새 법' 이 발효되기 이전의 말씀, 즉  모세의 율법이 아직도 살아서 지배하고 있던 때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2)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는 모세의 율법만을 신봉하던  유대인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다. 즉 이 말의 대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는 대제사장의 신복들에게 잡혀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날 저녁 제자들과 의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어 주시고 이어서  포도주잔을 제자들에게 돌리며 "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 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때 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명하셨다(고전11:25) 교회의  성찬식은  '예수의 죽으심'과   이 '새 언약'을 기념하는 것이다.

예수의 '새 언약'은  하나님이 오래 전에 선지자 예례미아를 통해서 "날이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 을 세우리라" 고 하신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다.

'새 언약'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옛 언약' 이나 '모세 율법'과는 다른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렘31:31-33)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옛 언약'과 '새 언약' 때문이다. 구약과 신약은 전체적으로 통일성과 연속성이 있으나 둘 사이에는  다른 점도 많이 있다. 그리스도의 '새 언약과 복음'이 온 후에는 '옛 언약과 모세의 율법'은 폐지 되었다. 십일조도  '모세의 율법' 중의 하나 이므로 역시 폐지 된 것이다. 구약은 신약에 의해서 재 비판, 재 해석 되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십일조를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은 원리적으로나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새 언약과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이다

 

십일조를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입장'이 아니고 구약의 종교인 '유대교의 입장'인 것이다. 기필코 구약의 율법을  고집하고 십일조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으심이 있기 전에  예수께서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이나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일 가운데에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제사도 드렸으나, 그리스도인은 할례를 받지도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는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켜 유대인의 의무를  다 하셨으나(막 14:12-16)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에게 찾아 갈 의무가 없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문둥병이 나은 유대인에게 모세의 율법대로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예물을 드리라고  명하셨지만(막 1:40-44)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에게 찾아 갈 의무가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일조도 버리지 말라'(마23:23)는 말씀도 모세의 율법아래 있던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구약의 율법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은혜의 시대, 복음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해방된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도 초대교회의  신도들에게 십일조 헌금을 요구하지 않았다. 구약시대의  십일조에는  오늘날   우리가  나라에 바치는  세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십일조를  취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에서 봉사할 뿐 아니라 현대사회에서의 사법관, 의사, 교육자,  행정관리가 담당하고 있는 일까지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율법을 오늘의  시대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시대 착오이다

 

복음의 원리와  부합되는 헌금은  각자 받은 은혜대로 자발적으로 바치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수입의 '몇 십분의 일'을 바쳐도 되고  능력이 있으면  '십분의 일' 이상이라도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이다.  헌금은 자유롭고  기쁜마음으로 바쳐야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은 반드시 교회에만 바쳐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것은 돈을 탐하고 영적으로 눈이 먼 종교인이 발명해 낸 반성서적인 법이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절망에 빠져 소외된 자들을  돕고 구제하는 것도 하나님께 바치는 훌륭한  헌금이 되는 것이다.(마 25:40) 

 

그런데 십일조론자들은 구약의 '레위기' 와 '신명기' 그리고  특히 '말라기서'를 논리의 근거로 삼고 있는 십일조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특히 말라기서 3:8-12 말을 들어,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재물을 도적질하는 것이 되므로 반듯이 벌을 받을 것이고  바치면  몇 배로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협박적으로 십일조 헌금을 요구한다. 물론 일반 교인들에게는 이러한 이론이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현대인에게  조선시대의 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한다.

 

십일조를 주장하는 자들의 '성경관' 과 '계시에 대한 이해' 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거의 치명적이라고 할 만한 약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에는 역사적으로  발전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대체로 무지하거나  무시해 버린다.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은  일시에, 완성된 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해와 그 정도에 따라 그리고 역사적 상황에 따라 점진적으로  주신 것이다.(히 1:12) 이런 것을  가리켜 신학에서 '점진적 계시'라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서도 어렸을때  지킨 율법에는 어른이 된 후에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법이 있다. 구약성서의 '십일조와 복 개념'도 그런 것이다.  구약성경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의 수준과 정도에 맞게 쓴 책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많이  있는데, 여기에 그 예를 하나 들어보면:  시편 137편의 마지막 부분에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는 자가 복이 있고  원수의 어린  아이를 바위에 메어쳐서 박살내는 자가 복이 있다'는 의미의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네 원수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라'는 예수의 말씀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따를  수 없는 말이다. 그런데 시편 137편은 그 때의  역사적인 상황에서  그들의 정도에  맞게 쓰여진 것임을 알면 이해가 간다.

 

고대사회에서의 십일조는 현대국가에서의 세금제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 교회의 교인들이,  나라에는 세금을 내고 교회에는 십일조를 내는 것은 세금을 이중으로 내는 셈이된다.  이것은  매우 부당한 것이며  일종의 착취행위라 할 수 있다.  구약시대의 유대교가 아닌 '교회의 십일조 제도' 는 성서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그저 감사와  기쁜 마음으로 자유롭게  헌금을 바치면  되는 것이다.

 

십일조는 모세 이전부터 있었던 관습이므로   모세의 율법이 폐지 된 후에도 십일조법은 폐지되지 않고  여전히 유효하다는 이론을 내세우는 자가  있지만  이것도 역시  근거가 없는 것이다. 모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서,  '하나님이 모세의 율법에서 허락하거나 명령하신 관습'은 십일조만이  아니라  '첩을 두는 것' '노예를 소유하는 것'  '남자의 할례' '동물제사' 등이 있었다.  그중에서 축첩제도를 말하면  아브라함과  야곱도 첩이 있었으며 솔로몬은 1000명의 처첩을 거느리고 있었다.(왕상 11:3)  

만일  사람들이  축첩은모세  이전부터 있었던  관습이며 아브라함도 첩이 있었고  율법시대에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니  우리도 첩을 두자는 이론을 내세워  첩을 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다 지나간  시대의 법이요,  관습에  불가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이러한 '노예제도'  '축첩'  '할례'  '동물제사' 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이와같이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에서 쓰여진 것이다.  '말라기 3:8-10' 도 영원하고,  보편  타당한  법으로 주신 것이 아니고 구약시대라는 역사적 상황에 맞는 말씀으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시며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역사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지도 모른다.

 

구약에는  수백 개의 율법이 있지만  예수를 통해서 '새 언약' 과 '복음의 새 법' 을 받은 신약시대의 교회는  '구약의 율법을 지키 아무런 의미가 없다' 는 것을 거듭거듭 강조  한 할수 없다.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적인 발전이 있었다는 것을 말 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라기3장' 에  의거해서  십일조를 바치라고 강요하는 것은   마치 고려시대나  초선시대의 법을  지키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성경을  육법전서와  같은  성격을  가진 책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십일조는 하나님의 유구한  구원사에서  하나의  '구시대의 법' 이므로  새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 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과  북미의  기독교 교파들,  즉 천주교회, 성공회, 루터교호,  장로교회, 감리교회 등에서  가르치는 일체의  모든 교재에는  십일조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유럽과  미국  그리고 캐나다의 전통이 있는 큰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라는 말을  한 번도 교회에서 들어 본  일도 없고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여자  서교사로  캐나다에서 한국에 파송되어 왔던  레노아 비참(Lenore Beecham) 이라는 목사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마치고  자기나라로 귀국한 후 어느 교회에서 설교하는 중에, 자기는 한국에 가기 까지는 십일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일부 한국의  교역자가 아직도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구약고 율법과 신약의 복음'  즉  '옛 언약'과  '새 언약'과의  관계에 대하여  무지하다고  밖에는  말 할 수 없다.  또한 '복음의 시대' 에 와서 아직도  십일조를 요구하는 것은   사도들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또한 '교인을 괴롭게 하는 것' 이며  '멍에를 목에 거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라기 3장에  의거해서 '십일조'를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아니며  구약적인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 문제'는 한 두 구절의  성경해석의 문제가 아니고  '모세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과의 관계'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관계'  그리고 양자간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의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들이  주로 교역자들의 설교를 통해 철저한 쇠뇌(Indoctrination) 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에서  한국의 교회만큼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가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십일조를 그렇게도 필사적으로 강조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냉철하게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

출처 : Chithoven
글쓴이 : Chithove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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