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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들 /1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이기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이기철 

 

 

잎 넓은 저녘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릴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 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 별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 번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작은 이름 하나라도  /  이기철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리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인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돌에 대하여  /  이기철

 

 

구르는 것이 일생인 삶도 있다

구르다가 마침내 가루가 되는 삶도 있다

가루가 되지 않고는 온몸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뜨겁게 살 수 있는 길이야 알몸밖에 더 있느냐

알몸으로 굴러서 기어코 핏빛 사랑 한 번 할 수 있는 것이야

맨살밖에 더 있느냐

이 세상 모든 것, 기다리다 지친다 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지치지 않은 게 돌밖에 더 있느냐

빛나는 생이란 높은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치열한 삶은 가장 낮은 데 있다고

깨어져서야 비로소 삶을 완성하는

돌은 말한다

구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삶이

작아질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삶이 뿌리 가까이 있다고

깨어지면서 더욱 뭉치는 돌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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