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이기철
잎 넓은 저녘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릴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 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 별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 번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작은 이름 하나라도 / 이기철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리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인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돌에 대하여 / 이기철
구르는 것이 일생인 삶도 있다
구르다가 마침내 가루가 되는 삶도 있다
가루가 되지 않고는 온몸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뜨겁게 살 수 있는 길이야 알몸밖에 더 있느냐
알몸으로 굴러서 기어코 핏빛 사랑 한 번 할 수 있는 것이야
맨살밖에 더 있느냐
이 세상 모든 것, 기다리다 지친다 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지치지 않은 게 돌밖에 더 있느냐
빛나는 생이란 높은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치열한 삶은 가장 낮은 데 있다고
깨어져서야 비로소 삶을 완성하는
돌은 말한다
구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삶이
작아질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삶이 뿌리 가까이 있다고
깨어지면서 더욱 뭉치는 돌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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