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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이야기/4

God's Secret Tear

안티증인 카페에서 올라온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무게로 눌려져 있던

삼킬 수도 밷을 수도 없었던 무거운 숙제 하나를 해결한 참으로 귀한 글이기에

제 불로그로 담아왔습니다..

 

 

..............

 

 

수천 년을 통해 색다르게 변천하는 인간 문명과 시대적으로 통용 되었던

시대의 인간사회가 용납하는 변화무쌍한 도덕사회들을

하나님은 접하시면서 인간에 맞추고 대해 주셨습니다.

 

년까지 없이, 근대 100 전에 존재했던 우리 한 민족의 도덕적 사회에

제가 만약 존재 했다면 지금의 도덕으로 나는 시대를 정죄 할 수 있습니까?

아마 100 전의 시대의 사람들이 나의 도덕을 도리어 정죄하며 나는 죄인으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대 법으로도 종들을 주인의 재산 중 하나로, 소유물로 인정 했습니다.

시대에서 내가 시대 차원의 도덕으로 종과 주인 사이의 빈약한 인간 존엄성을 들먹이며

차별폐지를 요구 할 수 있습니까?

아마 그리하신다면 나는 시대의 법의 적용으로 죄인으로 몰릴 것입니다.

 

더군다나 욥의 시대란 수 백년도 아니고 천년 전의 시대 입니다.

시대의 하나님의 축복이란 지금 현재의 하나님의 축복의 의미와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욥이 축복으로 소유한 귀중한 가족도 포함 됩니다.

단어의 뜻 자체가 벌써 틀려지기 시작 합니다.  

이것이 시대에 인간 존엄성에 익숙해진 우리 귀에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마는요.

하지만 하나님은 시대의 인간 윤리에 높이 하여 대하셨습니다.

하나님까지도 인간에게 높이에 맞춰

시대 나라의 대다수 인간들의 윤리적 표준에 마춰 주셨던 것입니다.

 

만약 님이 시대로 돌아가서 욥의 가족과 종들의 죽음을 현대의 인간 존엄성 표준으로

시대와 하나님을 정죄할 있습니까?

 

아마 십중팔구 님은 도리어 시대의 윤리로 정죄 받을 것입니다.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문제는 시대의 표준인 시대의 입니다.

우리가 현재의 옷을 입고  천년 전의 시대로 갈수 있다면

우리는 무례한 사람이고 벌거벗은 도덕적인 사람이자

시대의 문명에 도전하는 불량아 뿐입니다.

 

님은 시대도 계셨던 하나님,,

시대 사람들이 입었었고 하나님도 입었던 옷을 정죄할 없을 것입니다.

 시대의 통용되었던 서로가 합의 되었던 언어를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욥의 귀중한 자산,,귀중한 소유물 식구들인 아들 딸들과 귀중한 종들의 생명, 인간 생명도

소유물이라는 윤리적 언어의 옷으로 입고 그 시대의 사람들과 신들 가운데 자연스레 이해되어

통용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생명에까지 허락 했다면

욥의 죽음의 원인은 무었이라 구분지을 것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믿음 고수로 치른 댓가인 욥의 죽음의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리실 것입니까.

수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비참한 방법으로 죽었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허락한 죽임이 아니 였습니까.

 

수 많은 참새들이 하늘에서 떨어 졌습니다.

이 많은 참새들은 하나님이 허락해서 떨어진 참새들 아닙니까.

하나님의 허락이란 곧바로 책임전가라는 사상에 종속되어지는 정의로만 이해해야만 되나요. 

 

욥기의 상황때 처럼

모든 죽음들에 책임전가를 성경 내용에 하나님이 등장하고 안 하고를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머리 털까지 세신바 된 분 앞에서 모든 사람의 생명이 거두어지는것을 모를리 없질 않습니까.

 

이러한 취지로 볼 때 모든 종류의 죽음은 하나님의 허락이라 칭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의 원뜻이란 인지를 의미 할 것입니다.

 

다시 소유물이라는 욥 당시의 언어로 돌아 가겠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에게 오고 갔던 모든 사실을 하나님이 욥에게 미리 말하였다면

그래서 그의 소유물 중 가족이라는 귀중한 관계가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것을 욥에게 말 하였다면

소유물의 주인인 욥의 반응이 어떠했을 것이라는 것은 그의 인내의 역사로 충분히 유추해 낼수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욥의 가족은 욥의 소유물 이였던 것입니다.

마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더욱 더 소중한 소유물이 우리 인간들인것 처럼요.

 

그리고 이 하나님의 소유물 중에는 가인과 아벨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하나님의 소유물인 아벨을 살인 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동생을 살인할 것이라는것을 미리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허락 하셨습니다.

 

이 가인의 살인과  사탄의 욥의 가족 살인 두 종류의 살인 역시

하나님 면전에서 시작 되었고 또 허락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인의 살인 역시 하나님 차원의 법의 처벌에서 제외 시켜 주었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아벨과 욥의 가족들의 죽음은 무었을 위해서 죽은 것입니까?

꼭 사람만이 사람을 살인할때만 이유가 필요 없고 신인 사탄이 하나님과 관련된 후

사탄이 사람을 살인하면 이유를 필요로 합니까.

 

그렇다면,, 1) 사탄이 욥의 가족을 살인 했습니다.  

               2) 가인이 아벨을 살인 했습니다.

                이 두 시대에서 각각 벌어진 살인 사건 모두 하나님 면전에서 허락된 것입니다.

                

                  ....무었을 위해 허락 된 것입니까.

                 .....그리고 누가 어떤 이득을 보기위해 허락된 죽음들 입니까.

 

하나님은 사탄이 욥의 가족에게 범한 살인의 죽음들로부터 어떤 영적인 이득을 보았습니까.

소위, 욥의 가족의 죽음은 하나님의 정당성에 어떤 힘을 입혔습니까.

 

아니면 정 반대로 욥을 슬픔으로 몰아추켜 커다란 실망을 가증 시키며

더 나아가 불루 스카이님이 의심하는 그리고 비판론 자들의 먹거리용으로써 

 

결국 하나님이라는 신관에 치명타를 입혔습니까.

 

그 당시 욥의 신관에 이러한 누명의 치명타가 가해지고도 욥은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까.  

 

제가 끌어 내고져 하는 허락, 내지는 "너의 힘에 마낀다" 라는 진정한 신의  의미란 이것 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허락이란,,,

사탄이 살인을 통해 결국 욥 가족의 죽음이 하나님에게 끼칠 누명의 세력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 살인의 세력을 하나님은 허락,

즉  "사탄의 힘인 거짖,속임수" 인 그의 손에, 힘에 마꼈다는 의미 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욥의 식구들의 살인을 허락 했다는

그 누명의 세력을 사탄에게 허락함으로 자신을 누명 아래 희생했습니다. 

고로 욥의 식구들의 죽음과 가인의 살인은 하나님에게 득이 아니라 오히려 누명의 희생을 요구하는

잔인한 사탄만이 신 차원에서 사용하고 작용하는 세력으로 작용하여 그의 득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사탄은 이 누명의 세력으로 먼저 욥에게 그리고 그의 처에게 그리고 오늘날에까지 모든 오해로

신관에 오류의 세력을 불어 넣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 본문상 "내가 그의 소유물을 너의 세력,손 안에 넘겼다"  입니다.

 

욥의 식구들의 문자적 죽음외에 영적인 아무런 세력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죽음은 사탄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무의미한 무분별한 죽음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으로 하여금

욥의 소유물 중 가족의 죽음의 세력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찌르도록 사탄에게 넘긴 것이며 

사탄은 즉시 살인으로 죽음의 부정적 힘을 행사할 수있는 세력인

누명이라는 살인적 에너지로 변절시켜 하나님의 심장을 찌른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욥의 소유물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저의 글에서 하나님의 정당성에 욥의 사건과 연결한 종교들의 초등개념을 갈라 놓았습니다.

그리고 갈라진 틈에 욥의 사건의 실체인

하나님의 눈물을 뿌리와 여러가지들과 잎사귀들의 그림으로 채웠습니다.

님이 인정하든 하든

하나님의 슬픈 눈물로 그려진 안 보이는 배경의 전체 그림에는 하자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추리의 근거를 요구 한다면

님이 원하시는 방법인 성서에 근거한 뿌리기초에서 더욱 더 자세히 추리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배경을 이유는

신을 이해할 있는 보이지 않은 부분들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의 여유를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식구들과 종들을 살인할 권리를 주셨다 라는

필요이상으로 비약된 그 칼의 손잡이의 실제 주인공을 밝히며

또 그 칼의 실제 방향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더 잘 볼 수있게 할려는 개념의 장을 열어 놓기 위함이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두 번째 요소인 잠들은 언어로 인한 오해와의 화해를 위해,,

논리의 다른 장을 위해 글을 올립니다. 

그 시대적 단어들이 소유했던 잠자던 표준들을 깨워서 현대의 우리 신관에게 무었이라 말하는지

그 언어들을 변호석에 초대 했습니다.   

      

 마치 다음에 전개되는 배경들을 고대에서 현대로 혹은 현대에서 고대로

자유로이 이동시켜 확증을 위한 증거수집을 하려 합니다.

이것은  시대를 열고 대하는 창조주를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대에 사탄이 이리저리 두루 돌아 다니며 시대의 하나님 앞에 왔을 ,

과연 어떤 언어로 어떤 상황으로 현대의 욥에게 시험을 허락 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