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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들 /1

고동

며칠 전

온양형님댁에 전화를 드렸냐고 남편이 물어왔다..

어찌 된 일인지 크고작은 문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 한 해였기에

사실 지나간 계절의 바람처럼 그리 아득하게 느끼고만 있는 터였다..

딸애와 뉴질랜드 여행 때 만났던 어른들이셨는데

길에서 스치다 만난 인연 이상의 끈끈한 정이 저절로 흐르던 분이셨으나

몇 번의 왕래 이후로 연락을 드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더 진실에 가까운 사실은

남편과의 대화에서도 늘 내 친정쪽 어른의 입장에서 말씀해 주시던 분이셔서 그럴까

막연히 연락드리지 않고 있어도 사랑하고 의지하는 그 마음을 다 헤아려주실 것 같아

언제 시간이 나면 꼭 찾아뵐 것이라는 마음까지 알고 계실 것이란 믿음으로 인한 것이리라..

주변상황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전화를 넣어 상투적인 인삿말로 안부를 여쭙는 것으로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

이상하게 잘 안되는 나로서는 ..

 

누구보다 나의 성향을 잘 아는 남편으로부터 

"당신 때때로 차가운 사람이라는 말 듣는 거 알아?"  라는 놀라운 말을 듣고는 

그 말에 비교적 여유로웁게 

"나보다 사랑이 많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봐.."라며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답을 했다..

 

"사랑이 없다.."

"어떤 이들에게는 차갑게 느껴지게 한다.."

......     

 

가슴 속에 굽이굽이 펼쳐진 산맥 위로

메아리가 퍼져 울리는듯 하게 종일 그 문제에 생각이 머물렀다.

 

내 양심은

사랑에 관한한 

자신만만하던 나의 사랑에 대해 ..

수상하니 ..

검토해보라는 ..

엘로우 카드를 내 생각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본 이후 

내 영혼의 가슴에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바다에 사는 '고동'이었다..

 

 

 

관념이라는 집을 끌고다니면서

그 관념과 몸을 함께 키우며 평생을 사는 연체동물 ..

 

딱딱한 그 어떤 것에 닿기만 해도 그 자체로 상처가 되기에

그 관념이 보호가 되고 그 관념이 만든 세상이 보호처가 되기에

철저히 그 관념 속에 살기만을 고집하는 여리디 여린 속살의 얼굴 ..

 

공격할 줄 모르고

싸우기는 커녕

고동색 비닐딱지 같은 커튼으로

제 몸을 숨기기도 하고 자기 몸을 보호하기도 하여

날카로운 집게발을 가진 아기 게들마저 비웃게 만드는 어설픈 영혼 ..

 

돌보다 딱딱한 그 관념의 집으로 무시무시한 이빨이나 힘을 가진 다른 생명들로부터

자신을 보호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기에 

그 관념 속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관념이 되었었다.. 

 

살아있는 관념은 간혹 무시무시한 일을 보았다..

살아있는 관념의 속살을 꿰뚫어 본 영악한 생명들이

살아있는 관념을 잡아먹고

더이상 생명없는 관념이라는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하여

같은 관념의 집을 뒤집어쓰고 살아있는 관념들에게 부지불식간에 천적으로 나타나

그 살아있는 관념들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장면을 ..

 

그것을 몇 번 보고나서 살아있는 관념 속 생명은 소심해졌다..  

 

마음은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을 담고 있었지만 ..

육체라는 몸은

끝없이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의 모든 대상들의 움직임에 예민해졌으니

"네 눈으로는 고작 한 발 앞에 무수한 움직임을 담는 것이 전부 다이고

네 귀는 들리지도 않는 미세한 무가치한 움직임을 담기 위해 네 귀는 존재하는 것이냐?.. "라 비웃는 목소리에

말을 잃어야 했었다.. 

 

이후로 모나고 딱딱한 것은 두려웠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상처가 주는 통증과 회복되는 기간의 불편함이 무서워졌다..

나를 아프게 할 것 같은 대상이 나타나면 

이미 생명없는 관념의 빈껍대기인냥 관념이란 집 속으에서 숨어 죽은체 했고..

미세한 모래를 실은 까칠한 짠물이 들어닥칠라치면

있는 힘을 다해 고동색 비닐 방패로 밀어내버리고, 고요한 그 안에서 자신만의 평화를 찾으려 했었다..  

그리고 적어도 본능적인 두려움이 사라져야 그때서야 평화롭게 방패를 거두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랬다..  예민하고 약하고 여린 가슴들은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날 사랑해주는 이들이나 겨우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하는 사랑도 

본능적인 자기보호책의 하나인 관념 속 평안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었다..   

 

 

나를 돌아보는 길에서 이런 결론을 었었다.. 

 

여러 형태의 사랑에 상처를 받았는가 ..

그렇다면 그것은 관념으로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관념은 관념을 낳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한 사랑은 관념적인 사랑의 형태의 답을 바라고 있었다..

 

온전한 사랑은 그것을 있게 하신 신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

온전한 사랑은 그분의 창조의 흔적에서 배울 수 있는 거였다..

 

한번 내린 햇살은 되돌아가는 법이 없이 이땅에 선물이 될 뿐 ..

한번 내린 비는 하늘로 되돌아가는 법이 없이 땅을 적셔 이땅에 선물로 작용할 뿐 ..

뿐 .. 뿐 ..  뿐 .. 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엘로우 카드를 치우고 ..

나는 레드 카드를 내 생각의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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