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깁슨의 PASSION of CHRIST를 DVD로 새로 보았다.
그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도 처음 보고 났을 때와 똑같은 불쾌감은 남았다.
예수님의 육체에 가해지는 적나라한 장면들을 그토록 처참하게 질질 끌며 영상에 담는 의도가
상업성에 근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영화를 만들어 내질 못할 것 같다'
처음 보고 느꼈던 생각과 똑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불쾌감이 남기는 하였지만,
그 당시 상황들로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와 크기를 더듬어 보는 면에서는 감동적이었다.
같은 사건 속에서도 느끼는 감성의 방향은 다를 수 있다고 했던가?
나의 마음의 시선은,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로 아버지께 매달리셨던 예수님의 기도와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며 아버지의 침묵에 절규하하시던 예수님의 고난에,
침묵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에게 모아졌다.
우리 주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 인간들을 위한 사랑으로 마련되었던 것이고
그 사랑으로 그 험한 고난을 인내하시고 이겨내셨다.
그 예수님의 모든 사랑은 그분의 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안에서
시작되었고 그 사랑으로 당신의 아들의 절규에도 사랑의 침묵으로 인내하셨다.
우리 주께서 돌아가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 버리시는 것으로,
더 이상의 희생제물이 요구되는 제사가 필요없음을 나타내는,
아들 죽음의 가치와 의미를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전에는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를 위한 더 이상은 있을 수 없는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에
가슴 아파 통곡했다면,
이번에는 예수님의 아버지를 향하여 피땀을 흘리며 기도를 하는 당신의 아들을 지켜보고만 계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름하며 통곡하였고. 아버지와 분리되는 것 같은 고통에 절규하는 아들의
목소리에도 침묵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위한 크신 사랑에 가슴벅차 통곡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음은 당신 아들의 있을 수 없는 희생을 바탕으로 밟고 섰음이요,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초대 받았음은 당신의 독생자의
피와 눈물과 신음과 매맏음과 침 밷음을 당함과 치욕을 허락하심으로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 흔하게 사용하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 속에 그 많은 희생과 사랑이 서려있음에
또 한번 통곡하며 그 아버지 표현을 사용할 때마다 무거운 사랑과 가치를 감사해 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 난 날 밤.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면서 그 달 옆에 그림을 그려 보았다.
비둘기 한 마리였다.
한 쪽 날개에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가이 없는 사랑의 마련과 우리를 위한 인내의 침묵이란
글귀을 써 놓고
다른 한 쪽 날개에는 우리 예수님의 자신을 완전히 버린 사랑과 우리를 위한 인내의 마련이란
글귀를 써 놓고
두 글귀가 날개가 된 사랑이란 비둘기가 날아가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는 바쁜 날개짓의 어린 새 한 마리를 그려넣었다.
어린 새이기는 하지만 눈동자가 앞서의 비둘기에 고정된 하얀 비둘기였다.
어설픈 날개짓 하는 날개 하나에는 감사와 다른 하나에는 사랑이라 씌여 있었다.
그건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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