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보고 싶어!"
"살다가 살다가 이담에 이담에 만나 뵈어!"
밥 먹다가 하던 우리 부부의 짧은 대화였습니다.
전 하나님이 한번씩 많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품에서 쉬고 싶다는 뜻도 포함된 소망일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힘들기에 하나님 품에서 쉬고 싶냐고요?"
그것은 영적 시각의 굴절현상 때문입니다.
늘 같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데도,
어떤 날은 현실적 일들이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현실 생활이 영화를 보는듯 객관적인 입장으로 물러서기도 하는 것이
때때로 현실 생활과 받아들이는 자신의 마음이 동일한 환경에서도 다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현실적 일들이 선명히 다가 올 때에는 어쩌면 나에게 낯선 손님이 찾아든 것처럼 조심스럽고,
현실적 일들에 직접 뛰어들어 아무리 주관적으로 처리하려 하여도 관조적 제 삼자의 입장 이상으로는
다가가지지 않는 그런 상태는 걱정스러웠습니다.
때때로는 이렇게 일관되지 않는 저의 심리 상태가 아주 곤고합니다.
옆 사람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저만 겪는 그 곤고함은 저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에까지 다가가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무질서와 혼란을 좋아하는 이는 아무도 없겠지만, 어쩌면 제가 그것을 싫어 하기보다 그러한 상태가
저의 진을 빼는 정도가 심각하여 스스로의 보호본능이 가동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미 사람에게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하나님께 소망을 둔지 오래 되었고
인생에서 유일하게 가치를 둘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으로 마련된 구원 뿐이라는 사실이
아침이면 해가 뜬다라는 진리처럼 너무나도 확연하게 제 인식에 뿌리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가 고민하며 저울질 할 가치 있는 것은 이미 없습니다.
이 곳에 저는 이미 이방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방인의 자신의 본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하나님이 보고 싶다!"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너의 하나님이 정말 계시냐고 지겹게 따라다니던 질문이, 방향을 바꾸어
이제는 이 땅의 이방인이 되어버린 저에게 이 땅의 여러 감정들로 질문하고 나섭니다.
앞서의 질문에 내가 확신하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하나하나 답을하다 나중엔 지쳐 그냥 울어버렸듯이,
후자의 질문에도 이제는 울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드는 생각은 늘 "내 하나님이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저를 고소하는 자가 저의 어쩔 수 없는 저 역시 알지 못하는 더러움을 지적하며 비웃는다 하더라도 내 하나님께서는 아실 것입니다.
인간적 더러움은 더러운 흙처럼 묻어있지만 그 더러움을 걷어내고 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에는,
내가 찾아나선, 내가 받은 최고의 사랑의 수여자이신 그분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을요.
오직 그분 앞에서만이 제가 그토록 바라던 완전한 사랑과 온전한 질서와 명확한 진리가 있기에
그곳에서만이 제가 가장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 행복이 절정을 이루어 에너지가 되고 그 에너지로 빛이 되어버릴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날을 소망하며 오늘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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