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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1/5

선택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이름. 젬마!

그 언니 카톨릭 세례명이 젬마였다.

 

가을이 한창인 시월...

강원도 아치네 식구들이 버섯처럼 모여사는 곳에 아름다운 결혼식이 있었다.

단순한 디자인의 하얀 드레스를 입은 언니 머리엔 들꽃들이 꼽혀 있었다.

 

들꽃은 언니 머리에만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전체에 지천으로 피어있었다.

꽃 뿐만 아니라 나무 잎들과 억새풀까지 뜨거운 가을 햇살을 받아 빛을 내는 터에 눈이 부셨다.

 

그 화사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이 준비되고 있는 시간,

산 허리가 훤히 보이는 곳에 넋을 잃고 서 계시는 한복차림의 점잖아 보이는 어머니 한 분이 보였다.

그분의 눈에는 눈물이 머물러 있었다.

 

순간, 

이곳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던 젬마 언니 얼굴이 떠오르면서

이분이 누구신지,

이 기쁜 날 기쁨에 들뜬 이 버섯마을의 뒤안길 혼자 그분의 눈물 안에 담긴 마음은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난 다 알 수 있었다.    

 

 

SDA 교인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적극적으로 고대하던 무리들이 자급자족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당시 그분들을 정말 만나보고 싶은 마음으로 이곳을 일 년전에 찾아 들었고,

그 첫 방문 때 이곳에 머물고 있던 젬마 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말 수 없고, 잔잔한 미소를 대하면 나도 말이 별로 하고 싶지 않아졌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마주한 기쁨이 벅차올라,

현재의 모습 말고는, 지나온 개인적인 것들에 다가가는 것은

서로 마주한 평화로운 흐름을 깨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그 젬마 언니에 대해 별로 기억하는 바가 없다. 

아파서 이곳에 휴양차 와 있었다는 것,

언니는 카톨릭 신자이며 세례명이 젬마라는 것,

책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 그 정도가 전부였다.

농사일을 하다가도 쉬는 틈이 나면 그늘에서 앞치마 주머니에 있는 책을 꺼내 읽었다.

언니에게는 수녀같은 냄새가 났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날 결혼한다는 갑작스런 소식을 듣고 평창을 찾은 것이기에,

어떻게 결혼을 결정했는지 남편 되실 분은 어느 분인지도 모른채 달려갔기에

부모님의 허락 등 현실적인 일들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밤 늦게 평창에 도착하니 경운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웠던 아치네 식구 몇몇 분들과 예비부부와 함께 그 달밤에 경운기를 타고 산길을 오르던 기억은

내 기억인지 영화의 한 장면인지가 혼돈될 정도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잔치 분위기에 가려 언니의 속쓰린 그늘은 미처 돌아볼 새가 없었고,

흐릿한 기억으로는 언니는 고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더더욱 가족 관계에 대해서 언급을

나 스스로 피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내 눈 앞에 한복 입고 서 계시는 분을 보고는 난 육감적으로 바로 알 수 있었다.

젬마 언니 어머니셨다. 

동화 속 세상과 현실과 맞닥드리는 순간의 혼란으로 난 현기증이 났었다.

 

선택!  젬마 언니의 선택이었다. 자신의 사랑과 인생을 그곳에 던졌다.

조직화 되지 않은 순수한 믿음들이 들꽃처럼 자라나던 그곳.

세상적 미련을 없이한채 자연과 더불어 주님 오실 날만을 기다리던 가난한 영혼들이 머물던 그곳...

만일 여러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한 인생 쯤은 나도 그곳에 내 인생을 던지고도 싶었던 그곳...  

 

난 이미 인생의 가치를 평가하는 세상적 잣대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기에

젬마 언니의 선택에 대해서 아무 말을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세상의 이치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되었어도 그것은 허울의 잣대일 뿐

나름대로의 가치를 두고 그 길을 떠난 언니의 선택을 논할 수도 평가할 수가 없다.

 

단지 바램은 언니의 선택이었던 자신의 사랑과 자연과 함께한 소박한 생활 속에서 행복하기 바랄 뿐이다.

희미하게나마 기억나는 다른 얼굴들에 대해서는 그곳에서의 생활이

그들의 믿음의 실질적인 표현이었기에, 허망한 선택으로 인해 아파했을 세월에 가슴이 저리지만,

젬마 언니의 선택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 부분에서는 마음이 가볍다.

 

지금은 초로의 얼굴이 되었을 상상 속 빈 얼굴에 흐릿한 내 기억 속의 얼굴을 겹쳐보면

언니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을련지...

바람처럼 스쳤다 사라져버린 나를 기억하고나 있을련지...

 

아주 오래 전의 일이지만, 깊은 산 속 버섯 동굴 속 아름다운 작은이들만의 세상은 동화 이야기같이

늘 내 마음 속에 살아있다.

 

만일 그 곳에 내 운명적인 사랑이 존재하였다면 나 역시 젬마 언니처럼 그 용감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음을 난 알고 있다.

내 젊은 날, 내 운명이 그곳을 비켜갔다면 그것이 그 이유의 전부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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