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대한 이해에 있어
나만에 방식이 있다면
그건 타고난 육감에 의한 나름 정직한 접근방식인데,
그 정직성은 절실한 필요에 의한 진정성에 있었다.
내 생명에 가치를 찿은 것이자 내 뿌리를 찿는 일이었다.
몰랐으면 모를까 내 생명의 시작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비롯되었고
또 현재 진행형의 사랑의 범주 안에 있다는 사실을 들은 이상
그 행복해지는 그 사실을 찿아나선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적어도 내겐 그랬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절대 삼켜지지 않는 불편한 나의 특성으로
밷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딱딱한 몇 개의 떡을 입에 물고 있어서,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이 순간에 어떻게 계속 침묵하고 계실 수 있나?"
"저런 쳐죽여도 아깝지 않을 악인도 네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면
그 창조는 실패 아니냐?"
"기아로 죽어가는 가엾은 저 아이들을 봐라. 네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하지 않았거나
죽고 안 계신 것이거나, 무책임한 악한 신이거나,
그도 아니면 신이란 존재는 애초부터 없고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신을 만들어낸 것이다." 라는 조소어린 비아냥에
난 어떤 말도 못한채 벙어리 신세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주장은 자신들이 내려는 결론을 위한
매끄럽지 못한 논리의 틀에 끼워 문장화 시킨 것에 불과하였지만,
기존 성경 이해로서는 그들의 주장의 허를 끊어낼 재간이 없었기에
나는 그들이 제기한 문제의 핵심을 말씀 안에서 파헤쳐서
제대로 된 답을 찿아내어야만 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으로서 그것은 의무로 였다.
내가 창세기에 오래 매여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도었다.
얼마전부터 말씀들이 묶음 묶음으로 어떤 것은 낱낱이 일어나서 입체적 이미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물론 통해 들어 알게 된 지식들이 그 묶음 묶음들의 주가 되었고 그 묶음들이
내 입 안에서 겉돌기만 하던 그 딱딱한 낱낱의 말씀들과 연결되어 흡수되거나
또 어떤 것은 긴밀한 나사가 되어 묶음과 하나로 엮이면서
다차원적 세계를 이루며 내 눈 앞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그분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테마의 세계였고
그 세계는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였다.
그 세계에 대한 글을 표현하기란 참 쉽지 않은데 그것은 꼭 이런 느낌이다.
구도를 잡고 물감 묻힌 붓을 캔바스에 대는 순간
캔바스가 어떤 샘물로 변하여 샘물 위에다 물감 묻힌 붓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붓을 빼고 자꾸 머뭇거리게 되는 그런 느낌 말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
하나님의 창조에 담긴 그분의 영광과 자비와 사랑을 확인하는 일만큼 희망적이고
행복해지는 일은 더 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신실함이 깃들여져 있는 그분의 창조.
하나님의 모습과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의 창조는
아직도 여전히 진행형에 있다고 봄이 옳다.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 사람 즉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2장 8절 말씀에서처럼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지으신 사람을 그 곳에서 지내게 하셨는데,
동산 한가운데에 있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의 존재와 역할은
창조 여섯째날에 창조된 땅의 요소인 흙으로 빚어진 생명의 존재에서
영원성을 지닌 하나님의 모습과 형상대로 지어지는 과정에 필요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을 습득하는 성숙의 과정과 완성의 관문으로 봐야한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복 주신 창조의 마지막날인 일곱째 날로의 진입은
( 히브리서 3장 11절 )은 성숙의 과정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봐야한다.(창세기 3장 22절)
그런 면에서 둘째 아담으로 이땅에 오시고 아담이 실패한 과정을 온전히 이루시어
하나님의 승인을 받아내시고 (히브리서 1장 5절 )
아담으로 상속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같은 아담의 자격으로 홀로 지고 죽으심으로서
우리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의 은혜 아래 있게 해 주셨는데,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우리로 히브리서 4장의 은혜로까지 길을 내심으로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의 뜻을 모두 이루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과정에서 여섯째날 창조된 이땅의 다른 창조물과 같은 영역에서 창조가 멈춰버리게 된
아담의 후손들에게 있어
이땅에 다시 펼치신 하나님의 에덴동산이요,
에덴동산 안에서 죽음을 이미 해결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되는 생명나무 자체로 볼 수 있다.
언젠가 읽었던 글에서
구약의 모든 율법과 제사제도 역시
하나님의 약속인 창세기 3장 15절의 주인공이 오시기 전까지
그 시대에 맞는 에덴동산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 기능의 연장선이었다는
글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이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다시 보면
빛으로 드러나는 건 오직 신실하시고 자비하시고
영영토록 영광 받으시기 합당하신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신 그분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과 감사가
선명하게 드러나
그 환한 빛 앞에 더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