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눈에 비춰지는 추상적 관념 역시
나름의 형태라면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나는 그것을 그냥 '실루엣'이라고 하기로 했다.
영혼의 눈으로서만 확인할 수 있는 그것은
현실에서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문자적 표현과 공존하고 있는
그것의 실체로서
우리가 이미 인식하고 있는 문자적 사실이
도리어 그 실체의 최소한의 한 단면으로 내게 인식되고 있는 중이다.
내 어린 날에
삼킬 수도 토해낼 수도 없어 머금고 있었던 의문들은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답은 예상치 못한 전혀 다른 영역에 있었다.
질문에 답은, 질문이 생겨난 곳이 아닌 전혀 다른 영역에 있는 실체의 그림자로
질문이 자리하던 자리에 드리우고 있었으니까.
그 그림자를 붙들고 있는 나를
사람들은 무지목매한 맹신자라 손가락질 해댔고
그래도 엉거주춤 삼키지도 내밷지도 못한 상태로 지내온 지나온 내 날들에
적어도 나 스스로에게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고 있다.
아마도 내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리라..
어쩌면 그 그림자 역시 형태로는 실체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흔들흔들 울렁거려도 절대 토해내지 않고
그렇게 적지않은 시간동안 머금고 있을 수 있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글을 읽은 이들은 내가 '어떤 대단한 것을 깨달았나 보다!'라 추측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아니다.
난 그저 그림자와 실체가 겹쳐지는 아름다운 경계면을 마주하고
그 경이로움에 기쁨에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우리들의 창조주 하나님으로의 영광과 능력적인 차원에서
그 규모와 가치로 이해되고 받아져야 했다.
예를 들어
가난한 동네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허기진 배를 채울 빵의 공급이나
소낙비에 젖지 않게 할 우비나 우산의 제공이
그 아이들의 부모가 그 아이들에게 가지는
사랑과 관심의 규모 전부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가난하여 늘 허기지던 나였기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나는 덥썩 삼켜버렸었다.
입이 즐겁거나 배가 불러오지는 않았으나
다시 밷어버릴 수 없었다.
나는 항시 배고픈 가난한 이였기 때문이었다.
소화가 되지 않았다.
그것을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쓴디 쓴 위액이 나와야 했는데
그 쓴 물은 무엇이 죄인지에 대한 분명하고도 명확한 인식에서 비롯된
죄에서 구원 받고자 하는 의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스스로 죄인 됨을 께닫지 않고서는
어떻게 구원을 청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죄의 의미와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그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그 한계를 철저하게 깨닫고서야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암흑속에 빛으로 들어왔다.
그 빛은 쓰디쓴 위액이 되어
모래알처럼 위 속에 박혀있던 복음의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내가 깨닫게 된 죄는 우리네 관념을 넘어선 영역의 것이었다.
그것은 에덴을 떠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의 피안에 흐르고 있는 불안정한 존재감의 표출방식이었는데,
그들은 선악에 관한 어설픈 관념에 가두어진 채로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모든 선악에 판단의 중심에 자신을 두어
자신의 영향력을 그 어떤 형태로든 미치기를 원하였으며
이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물론 심지어 자신의 소중한 목숨조차 자기 의지아래 두었던 것이었다.
'살아가는 이야기1 > 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위일체에 대한 나의 견해 (0) | 2012.06.16 |
---|---|
이 세상의 왕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 (0) | 2012.03.27 |
내 영혼에 색깔 (0) | 2012.01.26 |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 (0) | 2012.01.03 |
허공에서의 가벼운 점프 .. (0) | 2011.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