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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1/5

내게 있어 크고 작은 두려움의 뿌리와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란

난 비교적 철학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내게는 눈앞에 드러난 현실보다

그 현실이 있기까지의 보이지 않는 뒷배경과 바탕과 이유가 늘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뒤죽박죽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관된 방향으로  

그래도 결과보다는 과정을, 일보다는 사람을, 목적보다는 관계를 중시하던 나였기에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나의 경직된 양심적 결벽증과 완벽주의 경향을 소유한 내성적인 나는

끝없는 자기 소모전을 겪어야 했고

나 너 구분없이 진흙더미에서 찰흙과 진흙을 가려내고자 하는 어리석음의 고단한 행보로 

생각없이 사는 이들보다 오히려 더 어리석기 일수였다.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소심한 것인지 섬세한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던 나의 예민한 양심의 센서 ...

무엇을 위해 작용해야 하는지 그 목적을 잃은 센서였던 것이 문제였다.

재는 것이 목적이 되어왔던 그 사실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 문제는 어쩌면 

원죄를 안고 태어난 아담의 후손으로서 

믿음으로 둘째 아담이신 예수의 후손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내가 몸부림치며 벗는 번데기껍질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의 팍팍한 완벽주의적 경향은 

인간의 그 어떤 악한 행위에 견주어 절대 가볍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원죄의 근원에 깊이 뿌리를 둔 악한 것이었음을 깨닫은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나의 관념적 양심의 센서는 기준이 잘못 설정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나는 온전하고 정의롭고 선하다' 였기에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나를 채근하고 자책하게 만들기로부터 타인으로까지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내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나름의 고정된 관념의 틀속에 갇히어 자신도 모르게 나와 주변을 판단하게 되어

상생과 화합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식 관점을 철저히 고수하며 비슷한 성향의 사람만을 가까이 두며

더불어 사는 사회라는 커다란 나무에 박혀있는 옹이처럼 사는 것은,

자신에게로 몰입되는 그 죄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내 하나님의 명령을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실제 온 마음으로 지킬 수 없게 하는 ...

말씀보다는 내 생각 내 감정적 의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만들게 하는 ...

우리 주님을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게 만들었던 바로 그 원죄의 에너지였던 것 ...


그렇다고 내가 반사회적이고 반이타적인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다.

도리어 사회적이고 이타적인 행동을 아주 중시하게 여기는 그 사실이

'사랑'이 아니라 

나를 위한 

관념화된 나의 '의지의 표현'이나 물러설 수 없는 나의 '자존심'같은 것이 되었다는

그 사실이 바로 진짜 나의 문제였던 것이다.

 



불변의 진리를 단순히 문자화 표현한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생명없는 것들은 질기고 팍팍하고 건조하여 유연성이라고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예외적인 일을 본 적이 없었다.


살아있는 것들은 마치 타고있는 촛불처럼 

늘 자신의 고정된 몸의 형태를 가지지 않고

늘 움직이지만 그것을 보는 이로하여금 늘 같은 이미지로 자신을 드러낸다.

적어도 내눈에 비춰진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그랬다.

빛처럼 다양한 빛깔의 사랑도, 정도, 우정도, 더 나아가 진리도, 진실도...

그살아있는 것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않고 움직이고 있으나 전해오는 이미지는 늘 한결같았다.


바람에 무수히 비틀거리며 심지를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에게 

바람에 늘 한결같은 반듯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려 하는 촛불이 있다면

그건 살아있는 에너지가 아니라 어떤 얇은 습자지 한장도 태우지 못하여 그 어느 누구에게도 

따뜻한 온기 한점을 전해줄 수 없는 그림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리라 ...




난 요즘 어떤 거울 앞에 서 있다.


그 거울앞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선한 것은 위대한 것이라고 ..

정녕 위대한 것은 순간에 갇혀지지 않고 무한히 증폭시키는 것이라고 ..


변화무쌍한 바람들을 만나면서 이지와 지성을 소유한 우리에게 왜 선하고 옳은 것에 대한 판단이 서지않겠는가마는 적어도 우리는 선한 것과 옳은 것에 대한 한계선을 긋지 않고 담담히 그 선하고 옳은 것들이 내는

선한 빛의 이미지를 각자 담아 스스로가 그 이미지의 연장선에 자신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이미지의 실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본으로 보여주신 당연 우리 주님이시다.


나로 고집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몰던 선한 것은 모두 일방적 경직된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근원부터 선하고 옳은 것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비록 선한 빵부스러기 같은 것일지는 몰라도. 

아뭍든 '토끼는 동물이다'라는 논리는 맞지만 '동물은 토끼다'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방향대로라면 

내 기본적인 자유를 담보하면서까지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구속하던 이들의 기본적인 자유까지도 담보하면서까지 

이뤄내려 하였던 그런 것..

 

어쩌면 희생이라면 희생이라 할 수도 있는 것들을 기꺼이 수락하면서까지도 지키려하였던 

나의 그런 희생적 열심이 

왜 익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못먹을 정도도 아닌 그런 상태의 열매를 낳고말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이 될련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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