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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1/5

하루

에덴에서의 첫 반역이 있은 후,

우리 인간들의 한정된 삶에서 각 개인에게 매번 주어지는 하루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시간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점같은 하루 ..  말이다.

살아있어도 진정 살아있다고 할 수 없어

어떤 의미에서 그 날 수가 많고 적음은 사실 그닥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는

그 제한된 흐름 속 하루 ..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측량할 길없는 팽창하는 거대한 선한 에너지의  자체이시며

그분의 독생자 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분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 나는,

오직 그분의 뜻에 의하여 비롯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또한

바로 그 에너지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의 세계가

사실 진짜 본 모습이며

형체를 갖추고 있는 이땅에 드러난 표현들은 도리어

그것의 그림자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분께 보여지는 세상은,

우리에게 보이는 그 이상의

무수히 움직이고 상호작용하는 에너지의 세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우리 육감에 의해 드러난 것만을 진실로 여기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우리 행동을 일으키는 의지 속에 담긴 에너지를 보시기에,

성경의 어느 필자도

그분께서는 우리의 심장과 신장을 살피시는 분이라고.. 기록했는지 모르겠다.

 

물질적인 육을 입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그 하루는

어쩌면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시공의 세계 속 

즉 우리 개인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에서의 시공의 기초 단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정말 우리는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방향으로만 고개를 두고서

그 하루에 최선만 다하며 사는 것에만 집중하여 산다면

"한 날의 수고는 그 한 날로 족하다"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불필요한 거품같은 허상의 감정에 놀아나 그로인해 벌어지는 비극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살 수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루' .....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속한 하루라는 관념적 단위가 만일 있다면,

그건,

당신의 뜻을 정하시고 이루어 완성시키시는 고차원적인 

입체적 텀 자체일지 모른다고 감히 추리해 본다.

그것은 당신의 뜻은 분명히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시제에서만 자유롭다면 그 뜻은 바로 드러나는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추리의 가장 중요한 핵은 바로 시제이다.

나는 하나님께 속한 시제를 우리네 인간이 소비하는 평면적 시간의 개념보다 확장된

것으로 볼 필요가 충분하며

창세기 1장과 2장에 기록된 창조는 분명 그분의 영역에 속한 시공의 차원에서

읽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창세기 2장엔,

그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이 다 지어졌습니다.

일곱째 되는 날에 하나님께서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되는 날에 복을 주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쉬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되어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안식으로 들어가신 일곱째 되는 날을 복 주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그 말씀에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또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의 쉼으로 들어갈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는 그 표현도

눈 여겨 본다면 나의 추리가 그리 황당한 것은 아니지 싶다.

 

일곱째 되는 날에 그분께서는 안식에 들어가셨다 기록되어 있으나,

인류는 죄에 빠져 사망과 고통의 세계로 들어가버렸고

인간이 죄를 지은 연고로 자연계까지 저주를 받게 되었다면

그분의 창조는 한낱 첫 인간 부부로 인해

그분의 창조는 불완전한 것으로 판명나 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 오시어

첫째 아담이 지키지 못한 당신의 공의의 법을 온전히 지켜내시고

아담의 원죄를 당신이 홀로 짊어 지시고 죽으시고 아버지의 우편으로 부활되심으로서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되심으로서

죽게된 인류의 새로운 구원의 길을 펼치심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완전하게 회복시키셨다고 이해한다면..

현재 여섯 째날 창조된 우리는 여전히  창조가 계속 되고 있는 중으로 봄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구원의 뜻을 다 이루시고 당신 우편에 부활되실 때까지 열심히 일하고 계셨다 생각함이 바른 이해가 아닐까 싶다.

그때서야 그분께서는 당신의 안식으로 들어가실 수 있었다고 나는 감히 추리하고 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하늘과 땅이 모두 당신의 뜻 아래 완성되는 천년 후에나 완전해져

우리들의 왕이신 당신의 독생자 예수로부터 그 완전해진 그 세계를 당신께 드리는 그날이

진정 당신의 천지창조의 마침이 되는 날이 아닐까 감히 추리해 본다. 

그 추리와 연장선에서 하나님의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창조과정은

창조의 도입부분일 뿐이며 본래의 뜻은 그분의 창세기의 말씀대로

"우리가 우리 모습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대로 하나님의 가족관계 안으로까지 였을지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천지창조에 관련한 창세기 일 장에 기록된 말씀과,

하나님의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완전하신 능력과 선하심,

구. 신약 성경말씀의 요점정리서와도 같은 히브리서 4장의 기록이

서로 어떤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가운데 

하나의 같은 이해 안으로 서로 흡수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해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선하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영광스러우심을

가장 믿음을 둔 구심점의 상태에서

당신의 구원의 약속의 증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두는 믿음의 자로

하나의 원을 그린 ..  하나의 원인 그림이기도 하다..

 

나의 성경적 이해나 추리가

모두 맞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극히 선하시고 높으신 그분께서

나의 이 이해나 추리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지혜로 또 분별력으로 나 스스로이거나 당신을 진정 사랑하는 이들의 것들을 통해

바로 잡아주실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