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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들 /담아온 글 ...

한 마리 매미가 우는 것은 / 허만하

한 그루 나무의 깊이에 숲이 깨어나듯, 한 주먹 흙의 깊이에 매미가 깨어난다.

 

한 마리 매미가 우는 것은 매미 안에 가득 차 있는 캄캄한 흙의 어둠이 눈부시게 소리지르는 일이다.

꼭지를 틀면 쏟아져 나오는 시원한 물줄기처럼 나무 잎새 그늘을 비집고 쏟아져 흐르는 매미의 울음소리.

지구에 사람이 깃들기 이전의 원시림에 호쾌하게 쏟아지던 은빛 소나기소리.

매미가 우는 것은 우윳빛 굼뱅이로 흙의 길이에 묻혀 지낸 맹목의 시간이  강렬한 태양 빛을 만나

물보라를 뿜으며 폭발하는 일이다.

 

매미가 허물을 벗는 것은 만년 뒤의 세계에서 허물을 벗는 여린 겨울 햇빛이

다시 한여름 뜨거운 햇살이 되는 일이다.

초록색 잎사귀의 명암을 적시는 울음소리를 위하여 매미는 어제의 껍질을 벗는다.

벗어도 벗어도 다시 태어나는 자아. 죽음을 거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는 목숨의 변신.

매미의 허물은 자아의 정체를 묻는다.

 

한 마리 매미가 우는 것은 모든 매미의 생애 안에 가득차 있는 캄캄한 흙의 총량이

일시에 지구 최초의 여름 아침 햇살처럼 눈부시게 깨어나는 일이다.  

한 방울 물의 깊이에 목마름이 깨어나듯, 흙의 꿈이 일시에 눈부시게 깨어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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