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쏟아지는 눈발에 갇힌 나는
완전히 한 편의 시다.
혁명도 망명도 모르는 원시의 평원에 눈이 내린다.
어디를 바라보아도 반짝이는 탄생과 소멸뿐인 세계
흰 눈송이에 묻히는 오리엔트의 지형
세계는 오직 자욱하다.
순수하기 때문에 안타까운 젊은 시절 위에 눈이 내린다.
정강이까지 눈에 묻히는 광야 한가운데서
나는 세계의 무엇을 닮을까.
끝없이 펼쳐지는 자작나무 숲 바라보며
나는 잎 진 두 팔 펼치고 서 있는 한 그루 자작나무다.
노을이 제자리에서 어는 것을 본다.
시는 세계를 얼어붙게 한다.
시는 함박눈처럼 따뜻한 손길이 아니다.
시는 다이아몬드의 칼날이다.
여린 풀잎에 발을 베여본 사람은 시의 아픔을 안다.
영하의 바람소리가 느닷없이 얼굴을 후려치고 지나는
아득한 설원, 먼 달빛같다.
시는 치유가 아니라 상처다.
물빛 바람이 제자리에서 얼어붙은 시베리아의 고원에서
언어는 벌써 말하지 않는다.
눈꽃처럼 부신 것으로 천지에 서릴 뿐이다.
그래..
치열하게 쏟아지는 눈발에 갇혀 있는 그 자체도
완전한 시 한 편, 완전한 그림 한 점일지 몰라..
그러다 그 시와 그림 속
하얀 눈과 창백한 자작나무와
얼어붙은 노을과 영하의 바람소리조차
지겨워지게 되면
봄날 평화로운 풀밭에 나비가 되는
완전한 시 한 편, 완전한 그림 한 장을 만들어내면 그만이지..
그러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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