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십자가위에 가상칠언(架上七言)
성경 : 눅 23: 34-46
십자가의 가상칠언을 대충 시간 별로 말씀 하신 것을 먼저 알아보면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숨지셨습니다. 그런데 오전 3시간 동안은 환히 밝은 대낮에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오후 3시간 동안은 눅 23: 44에보면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해가 빛을 잃고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갑자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고 하였습니다. 천지를 뒤덮은 어두움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전 세 시간 동안 제일 먼저 주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눅 23: 34에 따르면 오전 9시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 이니이다" 하시면서 자신을 못박는 원수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눅 23: 43에 따르면, 오전 11시 경에 두 번째로 강도 한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세 번째로, 오전 11시 20분쯤 되어서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염려하셔서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 19: 26-27보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 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 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전 세 시간이 끝난 후 정오부터 오후 세시까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지속 되었는데 네 번째로, 오후 1시 30분경에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격통을 호소하셨습니다. 막 15: 34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예수님이 절규했습니다.
다섯 번째로, 오후 1시 45분경에 예수님은 타는 목마름을 호소하셨습니다. 요 19: 28은 "내가 목마르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여섯 번째로, 오후 2시 45분경에 예수님은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요 19: 30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후 3시에 예수님은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시는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외치셨던 것이지요.
그럼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의 후반부를 다시 한번 봅시다.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다 이루었다"는 말의 의미를 한번 살펴봅시다.
희랍 원어로 "다 이루었다"는 말은 'tetelestai'입니다.
한 단어로 된 아주 짧은 말이지요. 19세기 설교가 촬스 스펄젼(Charles Spurgeon)은 이 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 한마디를 설명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일찍이 말해왔던 다른 모든 말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 말은 전혀 측량할 수 없는 말이다. 이 말은 너무나 높아서 내가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말이다. 이 말은 너무나 깊어서 내가 도저히 그 깊이를 잴 수가 없는 말이다.
"
그렇습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일생을 요약해 주는 말이라고 한다면 확실히 그 높이와 깊이를 우리의 유한한 지혜로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짧은 언어로나마 설명은 해봐야 할 것입니다.
희랍어 'tetelestai'는 '어떤 것을 끝맺는다'(to bring to an end), 혹은 '완성한다'(to complete), 혹은 '성취한다'(to accomplish)라는 뜻을 가진 동사 'teleo'에서부터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어떤 행위 과정에 있어서 성공적인 끝맺음을 의미할 때 씁니다.
물건을 사고나서 값을 다 지불한 뒤 이 말을 쓸 수도 있고 달리기 시합을 완주한 뒤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종이 주인이 부여한 사명을 다 완수했을 때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 보고를 할 때도 이 말을 쓸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tetelestai'라는 말은 우리가 시작한 일을 성공적으로 마칠 때 쓰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의 문을 여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승리 선언인 'tetelestai'에는 무슨 뜻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요? 주님이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이 끝이 났다는 것인지 핵심적으로 두가지만 말씀드립니다. ① 예수님의 고통이 다 끝났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고통으로 점철된 생애였습니다. '고난'이라는 말을 빼놓고서는 주님의 일생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과 하시는 일들마다 배척과 핍박과 죽음의 위험이 따랐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예수님이 겪으셨던 수난의 절정은 십자가였습니다.
이 시간 성경에 나타난 십자가 처형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부터 대제사장 가야바와 헤롯과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느라고 정신적으로 혹사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 총독 빌라도로부터 사형언도를 받으신 후 곧바로 채찍에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채찍은 무거운 가죽 끈으로 되어 있었는데 끝에는 두 개의 납덩이나 혹은 날카로운 동물의 뼈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런 채찍에 맞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는 피부가 상하면서 멍이 들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피부 조직이 찢어져 근육 속의 혈관들이 터져 나와 몸의 구석구석에 피가 고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극심한 빈혈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채찍을 맞은 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넘어지고 쓸어지고 무거운 십자가를 주님이 제대로 질 수가 없어서 구경 나온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졌다고 막 15: 21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보리 언덕에 도착했을 때 옷을 다 벗긴 후 십자가에 뉘여 손목 부위에 못을 박습니다. 손바닥에다 못을 박을 경우 몸무게를 견디지 못해 손바닥이 찢어지기 때문에 손목 부위에다가 못을 박았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가로대를 세워 올린 후 왼발과 오른발을 포개어 발목에 또 대못을 박습니다.
양 손목과 발목에 박힌 세 개의 못이 예수님의 혈관과 신경을 끊어서 다시 극심한 출혈이 시작됩니다. 몸이 쳐져서 손목의 못에 몸무게가 실리게 되면 예수님의 팔과 어깨에 무서운 아픔이 몰아쳐 옵니다. 이 때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몸을 위로 밀어 올리면 이번에는 몸무게 전체가 발에 박힌 못에 쏠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엄청난 고통이 몰려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빨리 죽여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의 극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이 다리를 꺾어서 빨리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릎 뼈를 망치로 깨뜨리면 사형수는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무릎 관절 주위로 1리터 이상의 피가 새어나와 빈혈 쇼크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 19: 31-37에 보면 예수님 양 옆에 매달린 강도 두 사람의 다리를 꺾은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는데 이미 돌아가신 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요 19: 34에 따르면 예수님이 돌아가셨는지 안 돌아가셨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로마 병사 한 사람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 부위, 즉 심장이 있는 갈비뼈 주변을 찔러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십자가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수치와 고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제 이와 같은 극한의 고통이 다 끝났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일생 동안 점철되어 온 고통, 특히 십자가의 고통이 다 끝났다는 말씀입니다.
② 희생 제사가 다 끝났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유일한 唯一回的(once for all) 희생 제물이 되셨을 때 그 때까지 지속되어 오던 모든 구약의 짐승에 희생제사가 종결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까지 유대인들은 각종 짐승의 희생 제사를 주기적으로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와 같은 희생 제사가 끝없이 되풀이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제사장들이 희생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결코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사실에 상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희생 제사는 예식적인 행사일 뿐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마음의 죄를 근본적으로 없애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히 9: 25-2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단 한번 십자가 위에서 대속 제물이 되심을 통하여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레 16: 6-10에 보면 아사셀의 양이 나옵니다. 속죄 일이 되면 대제사장 아론이 아사셀을 위해 제비뽑은 양 위에 손을 얹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그 위에 뒤집어씌웁니다. 그런 다음에 아사셀의 양을 광야로 내 보내서 다시 돌아오지 않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은 바로 이 아사셀의 양이 한 일과 마찬가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사셀의 양과도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전가시켜서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는 1년에 단 한 차례 오직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해주던 것이 바로 휘장이었는데(레 26: 33 참조), 이 휘장을 걷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 27: 51에 보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지성소와 성소를 갈라놓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이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직 대제사장만이 속죄일에 단 하루 지성소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 끝났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벧전 2: 9 참조).
그러므로 히 10: 19-20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찢어진 휘장은 찢어진 예수님의 육체를 의미하며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때문에 우리 모두가 살길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tetelestai,' 주님의 십자가로 구약 시대의 희생 제사가 끝난 줄로 믿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자기의 죄를 씻는 희생 제사를 드린 후 한 차례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 이제는 누구다 다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tetelestai,'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려는 사명이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일말의 후회도 없이 이 사명이 영원히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고대에 'tetelestai'라는 말은 어떤 물건을 산 후 값을 다 치를 때 사용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죄악의 빚이 지불 완료(Paid in Full) 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여러분의 모든 죄악이 용서받았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치러야 할 댓가를 주님이 대신 갚아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946년에 복음주의자 전국 연합회에서는 최근 5년 동안 하나님이 쓰신 가장 위대한 전도자가 누구인가 하는 아티클을 발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첰 템플톤(Chuck Templeton)이라는 젊은 설교가가 제일순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어떤 신학교 총장은 템플톤을 "오늘 미국에 설교에 있어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젊은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템플톤이 언젠가 디엘 무디(D. L. Moody)나 빌리 선데이(Billy Sunday)와 같이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템플톤은 출발은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하나님 위해서 재능을 쓰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썼습니다. 그 결과 그는 나중에 학적인 교만에 빠져 결국 불가지론자(agnostic)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 해에 쓴 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여 안녕」(Farewell to God)이라는 책이었습니다.
템플톤이 '십자가 선교 사역'(crusade ministry)을 시작했을 때 설교 동역자로 함께 일했던 젊은이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노스 캐롤라이나 출신의 이름도 없는 시골뜨기 빌리 그레이엄 이었습니다. 그의 시작은 미미했지만 그의 나중은 위대했습니다. 템플톤과 빌리 그레이엄, 얼마나 뚜렷한 대조가 됩니까?
시작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끝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눈을 감을 때 "하나님 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이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물질을 하나님 위하여 귀하게 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립시다. 'tetelestai,'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며 영혼을 부탁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위에 사는 동안 의미 있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잘 죽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잘 죽습니까?
사람들은 잘 죽는 것이 흔히 고통 없이 평안히 죽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가족들을 비롯해서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둘러 쌓인 채 평화롭게 숨을 거두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날씨가 춥지도 덥지도 않을 때, 좋은 일기와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또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를 때 잘 죽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성경적인 생각들이 아닙니다. 잘 죽는다는 것은 죽음의 모양이나 죽음의 장소 혹은 시간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라크 전쟁이나 9. 11 테러로 수천 명의 시민들이 비참하게 순식간 건물들이 무너져 잿더미가 된 채 처참하게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불치의 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다가 몸과 영혼이 크게 일그러진 채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여행길에 나섰다가 갑자기 교통 사고로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고로 강물이나 바닷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신자라고 해서 죽어가는 모양까지도 천사처럼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죽음의 모양을 우리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잘 죽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은 죽어가는 모양이나 죽음의 시간 혹은 장소와는 별반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갈보리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신 장면에서 생생하게 입증됩니다. 십자가형은 인류가 고안해낸 사형 방법 중에 가장 잔인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평화롭고 보기 좋은 모양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절명(絶命)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잘 죽는 것이 죽어가는 모양이나 시간, 장소와 관계되어 있다면 예수님은 결코 잘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고, 바울은 칼로 목이 베여서 순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2천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비참한 방법으로 순교를 당한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씀 드리지만 잘 죽는 것은 죽음의 방법이나 모양 혹은 시간이나 장소와 연관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할 수 있으면 평안하고 조용히, 적당한 시간에 아늑한 장소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를 원하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어떤 모양으로 세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들은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성경의 약속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의 손이 우리 영혼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지 만 잘 죽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보면, 잘 죽는 것은 죽음을 맞는 우리의 자세와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흥미로운 것은 신약 성경 그 어느 곳도 예수님께서 "죽으셨다"(died)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의 "영혼이 떠났다"거나 "하나님 손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시작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만일 우리가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영혼을 맡기는 자세로 최후를 마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잘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으로 마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시험과 인간적인 시련이 있었습니다. 도전과 배신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와중에서도 예수님은 일체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진행된다는 철석 같은 확신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십자가의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시간 계획표에 따라서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닙니다.
만사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죽음이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영생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되지만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가셔서 예비하고 계시는 천국에 도착하는 새로운 시작이 죽음입니다.
우리말에도 "돌아갔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손에 돌아가는 것, 그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신자의 죽음에는 더 이상 죄와 죽음의 권세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죽음을 정복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말씀 하셨을 때, 이 말씀은 시 31: 5의 말씀, 즉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시 31: 5의 말씀은 유대인 어머니들이 자녀들이 잠자리에 들어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을 청하기 전에 기도하도록 가르친 말씀이라고 합니다. "어두운 밤이 도착하기 전에 제 영혼을 주님의 손에 맡기나이다"하고 아이들이 기도하도록 가르친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내 영혼을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하고 말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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