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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이야기/4

자기 자리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인물과

인간 역사상 최악의 자리로 그 인생을 생각만 해도 괴롭기만한 인물 두 사람은

늘 저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였습니다.

 

사도 요한과 가룟 유다. 

 

저에게 유다의 자리가 그리 가볍게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향하여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그들의 돌보다 더 무거운 돌을 들고 유다가 선택했던 자리를 지켜보고 섰었습니다.

 

 

그리고서 우리는 우리가 살았던 인생에 대해서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답변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란 무거운 책임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그때는 몰랐었다라는 변명으로는 덮을 수 없는 자기 자리 몫의 결과가 나와있을테니까요. 

 

유다는 세상적 눈은 밝았을련지는 모르겠지만 영적인 눈은 거의 맹인 수준이었습니다.

그리하였기에 자신이 모시는 선생의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을 향한 위대한 그 사랑을 알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러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버려 죄와 죽음의 족쇄에 매여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신 분을

은화 삼십 개에 팔아넘긴 것이었습니다. 

 

그 영예로울 수 있는 가능성의 자리를 최악의 자리로 스스로  전락시켜 버린 것은

자신이 소유하였지만 그 소유한 것에 대한 가치를 몰랐던 영적인 어둠과

세상적 가치있는 것들을 위해 자신의 양심조차도 쉽게 버릴 수 있는 천박한 심성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작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예수님을 저주하던 드러낸 사탄의 끄나풀도 아니었고

예수님을 팔아 넘기려고 마음먹던 날에도 자신의 습관대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그가

앞서 사탄의 자식이나 앉을 수 있는 그 악한 자리에 그가 앉게 되었다는 사실은

저에게 너무도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시작이 하나님을 믿는 자리였다고 해서

사탄의 자식들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영원히 우리와 무관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한다고 해서 그 과정을 물릴 수는 없는 현실 속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생각할 때

우리 인생의 모든 과정에 신중을 기하여 살아야겠다는 생각 또한 갖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요구보다 저 스스로 악한 그릇으로 제 인생이 사용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살면서 선택해야하는 나의 모든 길들 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말입니다.

부족한 나의 감정적 선택에 맡기기보다 하나님께 속한 사랑의 방법에 맡길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입니다.

내 눈에 옳게 보이는 것이 또 내 생각에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 다 옳지 않을 수 있음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으로 저의 인생을 주장하여 주실 것을 간구드렸었습니다.

 

 

유다의 자리를 제가 절대 선택할 리가 없을 것 같지만

저는 그에게 끝내 제 손으로는 돌을 던질 수 없었습니다.

제 눈에 비친 유다의 영적 어둠의 어리석은 눈과 세상적 천한 욕심은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무거운 마음이 들수록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사도 요한에게로 저의 마음은 늘 달려갔습니다.

어떤 이였기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셨을까? 이런 궁굼증으로 요한복음을 읽고 읽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의 한 파트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약속과 선물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기도 하였고요. 

 

그리고는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증명하는데 제 몸을 던진

많은 사도들의 멋진 인생들이 부러웁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저 자신의 인생을 먼저 사랑하여 주시고

당신의 생명까지 바쳐서 저를 사랑하여 주셨던 

2000여년 전의 예수님이 사랑이 오늘의 일처럼 선명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완성하셨던 그 희생은 

오늘 이 시간에 일어나는 가슴 메여지는 일입니다.

흘러간 세월은 저에게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에게 해당된 오늘 일 뿐입니다.

 

저 개인에게는 그 날이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었으며,

제가 예수님을 알게 된 날부터 매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있는 날의 매일이 될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저는 2000여년 전의 사도들만 예수님의 사도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2000여년 전의 유다의 자리만 예수님을 배반했던 자리라 생각지도 않습니다.

오늘 이시간에 사도의 자리에 설 것입니다.

 

그 자리가 제 자리입니다.     

그 사도의 자리가 제 자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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