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교회만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도처라고 배웠으니까요.
교회를 갔다오면 하나님 품 안에 있다가
세상으로 다시 나오는 것처럼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빠지지 않으려고 했었습니다.
교회에서 배운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아버지께서 싫어하실 일은 억지로라도 피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성경을 토대로 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키우게 되었지만
그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은,
우리 앞에 놓여진,
우리가 행동해야 할 구체적인 일들이었습니다.
어린 저는 아버지의 그 감사함을 표현하기 위해
내 앞에 있는 구체적인 일에 열심히 매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의 모습을 율법주의자들이라 말하는 이들을 만났습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바리새인 취급을 하는 것을 당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을 곰곰히 들어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틀린 말 같지는 않은데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사랑에 감사하여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라 여겼기에
제가 아는 만큼 행동으로 보였는데 말입니다.
제가 만일 자기 의를 추구하는 바리세인 같다 하면 저는 교회와 조직의 희생자였습니다.
적어도 그때에는 말이지요.
성경을 읽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깊이 있는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글자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저의 상태가 저는 많이 괴로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긴 사랑이 저에게 등대가 되고 있었기 때문에
글자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의 제가 지닌 사랑이 늘 죄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행동으로 더 하나님의 사랑을 키우고 증명하려 애썼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죄를 지어 죽게 된 우리를 당신의 아들 예수을 보내 주시어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
이 한 문장이 뇌리에 박혀 그 사실로 아버지께 평생을 매이게 되었지만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들이 제 가슴에 새기게 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오늘날 제 가슴에 아버지의 깊이 있는 사랑이 담기기까지
많은 넘어짐이 있었고 많은 허망한 발걸음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 드렸던 수 많은 기도들과 아버지의 뜻을 구했던 여러 길목에서의 서성거림은
아버지께 다가가려는 애타는 저의 몸짓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들은 아버지 앞에 나아오는 모든 과정이 되었습니다.
그 까지는 모두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 중에 만난 수 많은 제 사랑하는 동료들의 얼굴들을 기억합니다.
나와서 보니 어리석기 그지 없는 헛된 발걸음로 보여지지만
그들의 한계는 그때 저의 한계였습니다.
저는 그들과 하나였기에,
그들 나름대로의 열심을 쉽게 평가하는 자리에
저는 절대 설 수 없습니다.
아버지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씨가 뿌려졌으나 가라지도 너무 많이 자라났습니다.
가라지의 씨도 많이 퍼져 거짓 사상을 가르치는 그 곳이 이젠 징그럽도록 싫어
하나님의 기도처라 부르는 어떤 교회에도 발걸음을 쉽게 옮길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 찬양을 드리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함께 부를 친구들이 없습니다.
이곳 카페에 모여 들어야
같은 아픔과 같은 믿음의 형태를 유지하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들락거리는 저희들을 가엾이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앞에 옳은 양심을 지키기 위해 그 족새를 과감히 끊어내고 나온
사랑스런 형제들의 눈물을 기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