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버지께 눈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 때는 초등학교 아주 저학년 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동생이 메디컬 센터에 신장염으로 입원했을 적 집안일을 할 언니를 외가에서 보내셨습니다.
아버지의 전화를 받은 저는 그 당시 서울역 가까이에 있던,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 터미널로
언니를 마중하기 위해 나갔습니다.
어머니는 병원에 계셨고 제 주머니엔 그 터미널로 갈 차비밖엔 없었습니다.
그 언니가 도착할 시간이 되어도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장소인 매표소 앞 그 옷차림새의 언니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한산해지자 저는 불안해졌습니다.
고속버스가 연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저는 너무 어렸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니를 만나지 못하면 돌아갈 차비가 없다는 사실이 많이 걱정스러워졌던 것입니다.
그 사실이 불안해 어쩌면 더 지긋이 기다리지 못하였는지 모릅니다.
불안해진 어린 마음은 아버지 계신 곳 밖에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있는 곳과 우리 아버지의 회사가 있는 명동은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만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셨습니다.
한번씩 아버지가 아프시면 어머니께서 녹두죽을 끓여 회사 수위실에 맡길 적에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저 만큼 떨어져 계시고 제가 죽을 수위실에 맡기는 심부름을 했었으니까요.
어머니 따라 아버지께 가는 버스길과 그 버스에서 내려 아버지 계신 곳을 찾아가는 길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으로는 서울역 근방에서 명동까지는 금방인것 같았는데 실지로 걸어보니 여간 먼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상태와는 별개로,
저의 아버지께서는 바쁘시던 일을 접으시고 터미널로 나오셨고, 부산서 올라온 언니를 찾았는데
문제의 제가 보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회사로는 빨리 돌아가셔야 하기도 했고, 딸아이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 언니는 집에다 데려다 주어야 할 상황이었으니 상당히 난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언니를 집에다 데려다 놓고 회사에 오셔서 터미널로 연락을 취하고 계실즈음에야
제가 땀에 범벅이 된 채로 아버지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전 아버지 만난 반가움에 세상이 환해진 듯 "아버지!"하며 다가서는데,
아버지는 벼락같이 화내시며,
"어찌 된 일이냐? 네가 여기엔 왜 나타나는 것이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인 전 순간 얼어붙어버렸습니다.
파랗게 질린 딸의 손을 잡고 나오신 아버지께선 자초지정을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에 관해 따끔하게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약속한 장소에 언니가 나타나지 않아도 아버지와 약속한 그 장소에서 계속 머물고 있어야 했었다고요.
약속한 장소에서 제 맘대로 움직이면 안되는 것이고,
무엇보다, 다른 변동이 있으면 아버지가 책임지러 오실 것을 몰랐느냐고요.
빵과 우유를 먹고 아버지가 태워주는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를 생각했었습니다.
저는 그 때 새겨진 기억 때문에 누구를 만나기로한 장소에서는 미련할 정도로 그 자리를 지키는
버릇이 생겨버렸습니다.
누군가 저를 바람맞히면 제가 꼭 해야하는 다음 일의 시간 직전까지 나의 시간을 다 날리도록 말입니다.
제 아버지와 엮인 약속에 대한 기억에서 깨달은 것 한 가지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에는 아버지의 관심아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께서 하라 하신 최소한이지만 전부인 그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전후 사정과 그 약속을 이후의 일에 관련한 것은 모두 아버지의 몫이었습니다.
앞서의 기억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구원의 약속으로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여러번 언급하고 계신 우리 구원에 관련된 수없이 많은 약속과,
우리의 거할 처소를 마련하고 다시 오신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들은 성경을 처음 배우면서 시작해서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
지금이 되기까지 기다리고 있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약속을 들은 날부터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희 중의 몇몇은 살아서 나를 보게 될 것이라 말씀,
너희의 처소를 준비하고 너희를 데리러 속히 다시 오시겠다 하셨던 말씀의 약속은,
제게 어느 순간도 내려놓을 수 없는 약속이었고
지금까지 제 가슴에 살아있는 약속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을 남기시고 지금까지 오시지 않는 것은,
어릴적 저의 어긋난 약속처럼 우리의 어린 생각과 예수님의 약속의 실현 사이에 무슨 어긋난 무엇인가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지금껏 놓지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