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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이야기/4

[스크랩] 예루살렘의 짖밝힘 VS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PREFACE

 

안식교에서 다듬어져서 러셀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던 말세론 연대 숫자놀이 교리 

교리들의 기초가 얼마나 부실하고 성서의 무식위에 세워 졌다는 것을 알때,

허망함 자체가 몰려 것이다.

 

현대의 말세론 종파, 여호와의 증인 교파나

밖의 음지 구역에서 구정물 냄새 나는 곳에서 아직도 말초신경의 촉각을 세우고

짜릿한 만민의 마약 성분인 말세론, 광란의 교리에

자신의 팔을 내밀며 교리의 주사 바늘을 꼿는 광기의 신도들,,,

 

이들은 이렇게 몸과 정신을 교리에 팔아 넘겨

자신의 몸과 정신을 숫자의 몸종으로  주웠다.

 

그들의 뇌리 속에는 오직 숫자만이 다닌다.

하나님이 짜리 숫자요, 예수님이 마지막 짜리 숫자이다.

 

하나님의 은혜도 예수님의 희생의 피도 숫자의 강한 마약성분 앞에 맥을 못추고 희석된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이들의 말세론 숫자의 밑을 받치고 있는 도움이들일 뿐이다.

이들에게 말세론의 연대가 무너지면,,, 하나님도 무너진다.

이들에게 말세론의 숫자가 바뀌면,,,,,, 예수님의 얼굴도 바뀌어 버린다.

 

이들은 하나님도 예수님도 이들만의 숫자로 박아 이들 종파의 십자가로 등장 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짖밝힘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을 같은 뭉치의 인양,

 

마치 끊어져 버린 실크 끝을 동아 밧줄과 함께 역어서 빗어낸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연대 숫자,

마치 잃어버린 명주 신발 오른발 한짝에 나막 신발 하나를 찾아 신고 떠난 어색한 말세론 여행길

마치 짤라 버린 포도나무 가지 끝에 올리부 가지를 붙쳐 얻어낸 희귀한 잡종열매,

마치 절단된 다리에 팔뚝을 붙쳐 동정어린 순수한 불구도 못된 무서운 인간 변종의 모습,,, 

 

이들은 이렇게 숭배의 짖밝힘 나라(정부) 회복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 버려

휘기한 잡종 교리들을 탄생 시켰다.

 

숭배개념과 나라개념을,,, 숭배의 무너짐과 정부의 회복을,,,

다시말해, 예루살렘이 의미하는 숭배의 중심과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나라의 개념을,,, 

숭배와 나라를 혼합해서  몽롱한 말세론 교리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신도들을 모아놓고 환각제 말세론 주사 바늘을 그들의 팔뚝에 꼿은 것이다.

 

성서 속의 숭배 다른 개념인 왕국 이라는 나라의 기초를 해치자면

무수한 시간들과 시간들이 의미했던 역사속으로 들어가야만 것이다.

 

나라를 탄생시키는 계약 숭배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법을 중심으로 논하여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많은 시간을 필요로하는 구체적인 개념의 이해들은

나보다 나은 일반 전문인 율법 학자들에게서 얻을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글의 핵심은 말세론의 기초 땅에 지진을 가져와

우선 부실한 숫자 교리를 허물어 뜨리는데 목적이 있다.

 

우선 말씀으로 땅을 가르고 ,

더욱 자세한 지식들이 세부적으로 침투 말세 교리들을

위에 세워진 숫자와는 상관없이, 다시말해 같은 숫자 개념으로 반격하는 위에서의 싸움이 아닌,

아예 땅의 기초를 모두 토막 버리고 불로 소멸해 버리는 지진 방식으로 대처할 것이다.

많은 님들이 지식의 모양으로 땅에 침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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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대 교리의 겉 모양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그리고 그 밖의 적지 않은 종파에서

예루살렘의 짓밣힘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

동일한 줄기 개념으로 풀이 하면서 많은 성서적 오류로

신도들을 혼동에 빠뜨렸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한답시고 연대에 심취해서 자신들만의 의미를

특정 성구에 부가하여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하고 헛된 교리로 사람들을 잘못 인도해 왔다.

 

그 특정 구절들을 별의 별 단어로 해석하여 그 의미를 늘리고 거짖 양념을 첨가해서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배도한 단순한 예루살렘의 징계 기간을  

전혀 다른 성구와 접목시켜 새로운 교리 깃발로 만들고 그 교리에 신도들을 모이게 하는

등잔대 아닌 등잔대로까지 모습을 갖추고 종교를 세운  것이다.

즉 성서 연대로, 말세론으로  왜곡된 빛의 중심으로 사용하여, 신도들을 모아 드리려는 하루살이 교리이다.

이 교리의 모습은 신도들로 하여금 헛것을 보이게 만드는 거짖 종착역 이라는 유혹의 깃발이다.

이 교리는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믿음과 구원과 생명과는 관계없는 빤짝이 교리 이다.  

 

 

 숭배개념 나라,  왕국 개념 차이

 

숭배,,,  이 숭배는 일찍이 아담 때 부터 시작 되었다.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시는 이 숭배 개념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 되었고

길고도 많은 숭배자들의 찬란한 행진이 현대에 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결코 중단된 적이 없는,  영원한 숭배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숭배가 이제 식구가 불어나면서 집단이 되고

집단이 불어 나면서 커다란 민족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즉 야곱 전체가 하나님을 숭배하는 민족숭배로 까지 확장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숭배개념은 어떠한 계약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쌍방이 아닌, 일방적인 통로이기 때문이다.

 

즉 숭배란, 개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 나오는

깊은 존경 내지는 높은 외경감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경감의 표현에는 물론 숭배받는 상대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지식이

법의 형태로 다가와 영원성을 유지하는 관계로 까지 발전한다.

다시 말해 숭배자가 창조주의 협박이나 압박으로써의 법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높은 외경감에서 나오는 자진성을 촉진하는 역할로써의 법의 초대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자진적 순종에 신의 분에 넘치는 선물로 즉 영원한 다스림을 생명과 함께

선물로 장식하는 아름답고 황홀한, 숭배와 법의 조화가 일구워 낸 개념이다.       

    

이러한 숭배의 감정은 일개의 개인으로부터 하나의 큰 민족에 이르기까지

그 크기와 시간과 관계없이, 혹은 쌍방 계약과 관계없이 이루워지는 자진적 행위로 나타난다.

가끔 이 숭배의 질이 시험받을 때도 있지만 징계를 통해 곧 숭배자가 다시 뉘우치고 수정되고 고침을 받아

지속적인 관계를 다시 회복한다.

이것이 숭배개념의 기본적 요약이다.

 

하지만 숭배의 후손, 민족으로써의 야곱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때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한 나라로써의 조건 계약을 체결 하시지는 않았다.

이 말은 하나님과 야곱 사이에  하나의 나라의 구조 형식을 갖추고

그분의 소유물처럼 여긴다는, 서로에 대한 충실 면에서의 남편과 아내 관계,

또는 주인과 종 혹은 왕과 백성이라는 다스림 성격의 계약 관계가 이루워 지지 않았다.

 

이 말이란 숭배 개념과 나라 개념과의 구별을 요구한다.

 

즉 하나님은 야곱을 이제 하나의 나라로써, 숭배개념과는 별도로, 탄생 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때가 되어 모세의 인도하에 온 야곱이 시온 산(호렙 산)에서 하나님과 왕국 계약을 채결한다.

즉 계약으로 하나의 나라, 왕국이 하루 아침에 탄생 된 것이다. 

 

이 야곱에게는 나라개념이 이때 처음으로 시작 되었다.

물론 이 나라 개념 속에 이미 존재하던 숭배가 중심 개념이 되어 심장 역할을 할것 이였다.

 

즉 순수한 숭배가 중심이 되어서 왕국이라는 상속 옷을 입는 찬란함 이다.

그야말로 “너희는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 나라” 가 탄생된 것이다.

이 말씀이란 왕국(다스림)과 숭배가 함께 공존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나라개념은 숭배 개념과는 달리 분명한 하나의 계약을 필요로 한다.

즉 계약에 의해 나라가 탄생되는 이념이다.

여기에 조건적 의미를 부과하자면, 쌍방 중 계약이 잘 이행이 안될 때

이 계약은 무효로 돌아갈 수 있는 조건 계약이다.

 

시점에서 예상할 있는 상황이란

 

1)       계약 이행으로 인한 쌍방의 관계 청산(많은 요소들이 포함)

2)       파혼으로 인한 상속의 불투명

3)       계약파괴로 인한 보호벽의 제거

4)       나라로써의 왕권행사 박탈 등등,,,,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므로 핵심만 집고 나아 가겠다.)

 

 아무튼 불행히도 이 계약은 쌍방의 관계파멸로

하나님은 옛 이스라엘을 징계할 계획으로 이방나라 바빌론을 사용하셨다.

즉 하나의 나라를 자신의 보호의 손에서 놓아 버림으로 야곱과 나라관계를

깨끗이 청산했다는 뚜렷한 증거이다.

 

즉 하루 아침에 계약으로 탄생된 나라가

계약의 파괴로 인해 하루 아침에 증발해 버린 것이다.

    

이 시점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요소가 있다.

 

이스라엘이 남편인 하나님으로부터 이혼장을 넘겨받은 주된 이유는

하나의 나라로써의 실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주된 이유는 야곱이 숭배적 개념에 배신의 발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이제 야곱은 보이는 하나의 나라로써는 영원히,,,

그 계약의 요구에 못 미치어서,,,

그 첫 번째 율법 계약에 튕겨져 나가 사라지고만 것이다.

 

하지만 숭배의 자유는 항상 뉘우침을 근거로 열려 있었다. 

 

예언된 70후, 기적적으로 그들은 고토로 돌아와 숭배의 중심지 예루살렘을 회복한 것이다.

즉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 전체의 짖밝힘으로부터 회복된 것이다.

성벽이 재건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나라의 구조를 상실한체

수십세기를 흘러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희망의 약속이 존재하고 있었다.

예레미아를 통해서 과거 모든 예언자들을 통해서

희망의 소식이 끊이지 않고 예언으로 주워졌기 때문이다.

 

그 희망이란, 새 계약, 새 언약 이 이른다는 것이다. 

이 새 언약이 왜 그들에게 희망 인가?

두말할것 없이 계약이란 나라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나라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계약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 계약이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서는 희생의 피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계약의 요구와 그 수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로 된 백성의 죄 때문 이다.

 

이 시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인물과 이 인물이 수행한 새 계약의 중개역활을 소개한다.

즉 또 하나의 인간이,, 왕국을 받을 준비를 위해 이 지구상에 투입돤다.

그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중 중요 요소 한 가지는 새로운 계약의 채결 이다.

계약이 있다면 나라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더 이상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없는 논리이다.

 

예수와 계약 그리고 하늘왕국,,,

 

대목은 건너 뛰기로 하자.

 

아마 위의 이 소 재목이 뜨므로 당신은 왕국의 비밀을 알아 채렸을 것이다.

야곱의 변신을 알아 채렸을 것이다. 즉 옛 이스라엘의 나라로써의 자취를 감추고

이제 한 중개자의 피의 희생으로 인해 계약이 다시 체결되고 왕국이 우리 가운데

보이지 않게 임한다는 비밀 말이다.

“ 하늘 나라는 여기있다 저기있다 보이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국은 바로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라고

설명해 주신 예수의 말의 의미를 말이다.

 

그렇다.  왕국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보이지 않은 믿음 안에 이미 다 담아 놓았다.

숭배가 중심이 되어서 나라를 상속 선물로 받는다는 믿음 말이다.

이 믿음이, 예수로 된 이 믿음이 당신 마음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는 “진동하지 않을 왕국을 받지” 않았는가?

 

이 왕국은 진동시키는 음성, 시온산의 계약으로 인해 탄생되지 않았는가?

하물며 믿음으로 하늘의 시온에 오르는 당신은 이 진동 하시는

예수의 음성을 듣지 않는가?,

 

이 나라의 탄생을 의미하는 계약의 진동들을,,,

즉 첫 번째, 창조된 진동하는 왕국을 제거 하시고

두 번째, 창조되지 않은 영원히 진동하지 않을 왕국인 아버지의 보좌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속해 온 하늘의 왕국을 받지 않았는가?       

            

그렇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인간 역사 연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개념에,,,,믿음의 순종의 자녀들을 위해 상속 선물로 보존해 두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왕국의 회복을 새 계약의 피로 시온산에서,,, 지성소에서 약속으로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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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짖밣힘과 그 짖밣힘으로 부터의 회복

 

 

다시 옛 이스라엘로 돌아가자.

숭배의 법을 저버린 한 나라를 징계의 채찍으로 다스릴 때,

하나님은 배도하고 간음한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소식을 전했다.

즉 온 이스라엘 나라의 정계회복이 아닌, 예루살렘의 숭배회복을 예언해 놓은 것이다.

즉 예루살렘의 짖밢힘과 회복이라는 단계를 미리 예언했다.

 

만약 그때의 짖밝힘과 그 후의 회복의 때가 , 

안식교의 교리나 그 교리를 안수 받은 러셀이나,

연대에 흥미를 가진 그 어떤 연구생 모임들이 주장하듯, 수 천년 뒤라면,,,(1914 혹은 19xx 이든),

하나님은 회복을 70년 동안 까지라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예언했다는 사실이

참 우수운 꼴이 된다.

 

간과 해서는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하나님이 예언한 회복이란 숭배적 회복을 예언한 것이다.

 숭배의 중심지인 성전을 품고 있는 예루살렘의 회복이라는 요소이다.

 

쉬운 말로 하나님은 언약을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와는

언약이 이르기 까지 왕국을 유보해 두셨던 것이다.

 

하지만 계약이 필요치 않은 숭배를 다시 허락하므로 예루살렘은 그 짖밣힘으로부터 곧 회복 되었다.

하지만 하나의 나라로써의 주권행사는 그 이후 이스라엘에게서 박탈하여 다윗의 후손 예수에게 주워졌다(차후설명)

즉 나라가 새 계약으로 예수 안에서 회복된 것이다.

 

여증을 포함해서 그리고  다른 기독종파들은  이러한 옛 이스라엘 나라의 붕괴사건의 성격을

제대로 분리해 놓지 못하였다. 바빌론 침략 때 일어난 예루살렘의 숭배적 짖밝힘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때 까지라는 혼동으로 짖밝힘의 연속으로 묵어놓는 실수를 범하고 더 나아가 언약을 깬 이스라엘과, 헤어진 남편인 여호와의 관점에서 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새 언약을 배재한  문자적 나라 개념으로 연대 숫자 파 해치기만 몰두한 꼴이다. 즉 문자적 왕국이 자취를 감춘 이유를 문자적 측면에서만 그 결과를 찾고자 했다. 마치 일세기 고대의 유대인들 처럼 유형적 개념으로된 왕국에 초점을 계속 마추고 만 것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을 어이없는 논리의 신으로 추락시키는 이론이다.

새 계약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나라가 어떻게 탄생되는지, 예루살렘이 무었을 의미하는지,

전혀 고려치 않은 문자적 나라 개념에만 몰두한 무식이 낳은 형식주의 교리인 것이다.

 

"이방의 침략의 때가 차기까지 예루살렘이 짖밢힌다" 라는

예수의 명료한 예언을 이들 교리쟁이들은 과거 옛 이스라엘의 붕괴 사건에까지

그 고리를 연결하여 예루살렘의 숭배회복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적 파괴를

같은 줄기 길이로 보게 한 큰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들 교리가들 에게는 예루살렘의 성벽의 재건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다시 품으로 받아드렸던 예루살렘의 딸들이 이들 눈에는 별로이다.

 

이들 눈에는 오로지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짖밝히리라 라는 말씀을

나라 개념으로만 쳐다보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회복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성전을 품고 있는 숭배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이방 나라들의 침략에

처참히 짖밢힌다는 뜻이란,

숭배가 제거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이 회복 된다는 뜻이란,

성전 파괴로 제거된 숭배가 다시 진행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로써의 예루살렘의 숭배회복을

하나의 왕국개념으로 된 국가 이스라엘의 회복과 맞물려 역어 놓는다면

그야말로 밥인지 죽인지를 구분 못하는 격이다.     

 

과거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란 신과 신 사이의 힘 겨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전쟁의 종착역은 언제나 그 나라 신의 성전을 짖밢는 일로 종결 지어지곤 했다.

 

하나님이 이방 나라를 사용하여 예루살렘을 징계하기 위해 사용하신 기간은,,,,

즉 예루살렘을 무참히 짖밝는 일은 황폐의 기간을 다 합처서 70년 동안이었다.

 

그 이후에는 감격적인 회복이 있을 것이었다.

그 이후에는 성벽이 회복되고 다시 숭배가 회복되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예언하신 것이다.

예루살렘의 짖밣힘에서 이스라엘의 나라가 아닌,

예루살렘의 숭배를 회복시킨 것이다.

 

 

이제 "정해진 때" 가 되어서 70년 이후 몇 차례의 그룹이

그룹별로 바빌론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오기 시작하면서

예루살렘은 이방 나라의 짖밝히는 징계로부터 순수히 회복된 것이다.

 

그 이후 더 큰 나라인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손,바빌론의 지속적인

정치적 간섭의 식민정치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순수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였다.

 

내 말은 살벌한 짖밝힘과 그후 진정한 회복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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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째 짖밝힘과 짖밝힘으로 부터의 회복

 

기원 32년경인가,,, 다시 한번 예루살렘이 짖밝히는 징계가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다.

예수는 이 예언을 예언자로써 예언한다.

예루살렘이 처절히 짖밝히는 재앙을 예언한 것이다.

그리고 짖밝힌 예루살렘의 회복을 자신의 오심과 연관 지어서 해방 또한 예언했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예루살렘의 짖밝힘과 회복에 관한 예언이다.

 

자 ,,, 한번 교파들의 거추장스런 연대 잡 교리들을 벗어 던지고 순수 히 자문해 보자.

일 세기 때 예수는 이 예루살렘의 짖밝힘을  왜 다시 예언했는가?

 

이 "예루살렘이 짖밝힘이 당하리라" 에서

이 "짖밝는다" 라는 상징적 말의 진정한 의미란 무엇인가?

 

내 초점은,  

만약 예루살렘이 고대 바빌론에서부터 계속 짖밝혀 왔다면,

왜 예수는 예루살렘의 짖밝힘을 또 언급하는가 말이다.

 

좀더 이해가 당신의 피부적으로 와 닿기를 위해 쪼개서 질문한다.

예수가 경고한 이 예루살렘의 짖밝힌다는 의미를 왜 예루살렘의 처참한 살육과 재앙과 

전무후무한 지독한 파괴적인 전쟁으로  해설 했는가 말이다.

 

바로 뒤이어 이 무시무시한 보충 해설을 하신 예수는 고대 바벨론 때부터

지속 되어온 이스라엘의 정치적 짖밝힘을 언급하는 것인가?  

 

예수의 이 두 번째 짖밝힌다는 예언은 당신 보기에 고대 예루살렘으로부터

이미 시작된 고대 예루살렘의 짖밝힘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의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을 향한 대 예언은

과연 부활 후 예수의 제자들도 기대했던 "주여 이스라엘을 회복 하심이 지금 입니까?" 라는

정치적 요소로써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회복을 위해 제자들에게 암시했던 것이었는가?

    

매우 쉬운 것부터 따지자면,,,

만약 예수의 이 두 번째 짖밝힌다는 예언이 정치적 강국의 속박 면에서의 지속이라고 의미 한다면,,,

이것은 예언이 절대 될 수 없다. 

그것은 예언이 아니라,  단지 그 당시 현재까지 진행중인 이미 짖밝힌 예루살렘 역사 이야기에 그치고 마는

단순한 잡담이나 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예수는 두 번째 예루살렘의 짖밝힘을 경고로 발하고 계시는 중 이였다.

그리고 부활 후에는 제자들의 어린아이와 같은 예언에 대한 이해 부족의 질문에

다른 더 중요한 미션으로 제자들의 주의를 돌리신다.

 

즉 듣는 이들로 하여금 이 짖밝힌다는 라는 의미란

매우 특출 나고 확실한 크나 큰 재앙으로써의 짖밝힘을 또 다시 경험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미 오래 전에 회복된

예루살렘에게 또 닥쳐올 새로운 짖밝힘을 경고로 예언하시는 중 이셨다.

 

예수의 ",,,짖밝힌다"  라는 초점은 여호와께서 이미 행하셨던 징계인,,, 숭배의 중심 예루살렘에 국한된 것이다.

 

이스라엘 이라는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나라개념과,  

이 징계의 초점인 숭배개념의 중심부인 예루살렘의 짖밝힘과는 거리가 있다. 

 

 

이 일 세기 때 이방나라에 의해 때가 차기까지 무참히 짖밝힌 예루살렘은 또한 회복의 오심과 더불어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철저히 회복 되었다.(차후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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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째 짖밝힘과 짖밝힘으로부터의 회복

 

    

 개념의 파괴,, 이방 나라개념에 의한  거대한 침투, 이방개념의 때가 차기까지 예루살렘의 짖밣힘

 

거대한 군대들인 이방나라 개념들이 이스라엘 땅에 예루살렘의 성벽을 기어 오르고

그 안의 온갛 열매와 잎사귀들을 다 싹슬이 한다.

성전의 온갛 지식의 제물이 메뚜기 꼬리에 의해 속임수로, 거짓으로 강탈 당한다.

예수의 개념이 이스라엘 진흙거리에 내 팽개쳐 진다.

 

오늘날 일곱 등잔대 주위에 모여있는 배도한 예루살렘의 짖밝힘이다.

 

예수는 다시 한번의 예루살렘의 짖밝힘과 아름다운 회복을 계시로 요한에게 주신 내용이다.

예루살렘의 빛들이 강타 당할 것이다.

해의 1/3 이 강타 당하고

달의 1/3 이 강타 당하고

별들의 1/3이 강타 당하여 빛을 내릴 것이다.

즉, 해와 별과 달의 빛을 입고 있는 하늘의 여자, 예루살렘의 모욕의 시간인 짖밝힘이 닥친 것이다.

전무후무한 이방개념의 출몰과 예루살렘의 몰락이다.

 

하지만 이 예루살렘이 다시 이 무시무시한 징계의 짖밝힘으로부터 회복되어

찬란한 신부 예루살렘으로의 단장의 회복을 맞이할 것이다.

 

이 예루살렘은 먼저 일곱 나팔의 경고의 기간 중에 던져져서 고난으로 징계받고 깨끗하게 정화되어서

그룹별로 이방개념에 대항하여 싸우고 이기고 해방돼서 그 큰 바벨론 개념으로부터 그룹별로 나올 것이다.

이 징계의 짖밝힘에 던져질 때는 여러 교리로 갈라진 지파들 이겠지만 해방되어 나올 때는 

단 하나의 개념인 예수개념으로 연합된 예루살렘으로만 나와서 성벽을 건축할 것이다.

이 성벽의 기초들이 먼저 해방 되어서 개념의 12 기초를 세우고 그 위에 아름다운 성벽을 건축할 것이다.

이 성벽들에는 진주의 12문이 존재할 것이고 이 진주의 진리를 찾는 자들만이 이 문으로, 이 개념의 문으로

이 성안에 들어와 정금의 거리를 형성할 것이다.

 

세 번째 예루살렘의 짖밝힘과 영원한 회복이다.

 

이처럼 시대별로 짖밝히는 예루살렘과 또 시대별로 회복하는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이처럼 짖밝힘과 회복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어느 종파들의 미친 연대교리들에 휘말려 들어 있을 수 없는 자유의 여자이다.

 

 

솔로몬의 아가, 시대별 예루살렘의 비밀 이야기

 

너무 고집을 부려 40년 동안 광야의 해에 그슬리어

너의 얼굴이 검게 타을지언정,,,,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지 않아 엉망으로 만들었을지 언정,..

창피의 망토를 쓰고 어두운 거리를 헤매었을 여자였을지언정,,,,

박에서 두드리는 그이의 문 두드림을 거절하고  잠의 꿈에 잠깐 게으름을 피었을지 언정,,,,

파수꾼의 징계의 막대기에 혼이 나서 벌거벗음으로 벌을 받았을지언정,,,,

시대적 온갛 경험으로 험난한 바람의 세월과 하늘의 위로로 회복을 거듭한 여자, 술남미 여인이여, 

 

아름다운 여인 예루살렘은 언제나 회복의 뉘우침으로 아름다움을 장식할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넘치는 지식의 두 유방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킬 것이다.

그녀가 아직 자라지 않아 소녀라면 나는 그녀의 정혼을 말할 것이고

그녀가 아직 소녀라서 싸울 수가 없다면, 나는 은으로 된 망대를 세워서 그녀에게 싸움을 가르칠 것이다.

그녀가 성문이라면 썩지 않을 백향목으로 문을 만들어 줄 것이다.

영원한 빛을 발하는 여인, 나의 누이, 술람미는 수십 세기를 거쳐 짖밝힘과 회복을 거듭하는

아름다운 여인, 아름다운 신부, 예루살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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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을 비출 빛이 먼저 출현함.

 

 

 

이 신부 예루살렘 성 안에 성전이 이미 빛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첫 번째 나타나는 성전 입니다.

이 성전이 이 성막이 예루살렘 전에 먼저 생겨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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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예루살렘이 짖밝힌다는 말의 의미를

거짖된 연대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의미적 근원으로 접근 했습니다.

 

연대적 차원의 맞고 틀리고를 따지는 방법으로 이 교리를 서로 논한다는 것은

이 짖밢힌다는 말의 의미에 여증교리의 연대를 이미 끼워 맞추는 토론인 고로

말 장난과 역사기록만을 가지고 논해야 하는 허점이 난무 합니다.

 

 

 

믿음을 소유한 신자들의 마음 속에서만 열리는 이 하늘 왕국의 참된 의미를 안다면

모든 연대 교리가 무색해지는,,,사기 소설들에 불과한 역은 이야기들 이라는 것이 확증될 것입니다.

 

연대교리의 피해자들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또 뵙겠습니다. 

 

 

출처 : i 여호와의증인 정보카페
글쓴이 : 띄인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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