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로 누군가 날 찾아왔었다.
그 당시 필리핀에서 돌아와서 새로운 대학 건축공학과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날 찾아 온 이는 나보다도 어린 남학생이었다.
날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첫 마디가 "안경을 쓰셨다고 하셨는데..."
무슨 말인가 싶어 쳐다보다가 난 무슨 일로 날 찾느냐고 물었고
그 학생같아 보이는 아이는 대답 대신에
혹시 서울 어느 여고를 나오시지 않았냐고 물었다.
무슨 일로 날 찾느냐고 다시 물었고
그 학생은 확인만 하고 오라고 시키셨으니
확인만 하고 간다는 말을 남기고는 뒷모습만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난 그 다음 날 휴학계를 내기로 되어 있었다.
결혼 준비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난 날 찾는 이가 아마도 누구였을 것인지 어림잡아 알 수 있었다.
그 아이 아니면 십 년 전의 나를 더듬어 찾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니까 말이다.
손 시려울 것같아 빌려준 벙어리 장갑 한 짝을 어찌 그리 소중히 다루는지...
난 그 아이의 그 손동작에 그 아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가 나에게 선물로 준 '이문열씨의 사람의 아들'이란 책을 들고 있는 내 손이 시리겠다며
다시 받아들어 맨 손인 제 손으로 들고 있기에
내 벙어리 장갑 한 쪽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그 장갑을 한 쪽 손에 끼고 가만히 주먹을 쥐는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화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 내 마음에서 이상한 아지랑이같은 것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사랑의 감정이라라 짐작했다.
순진한 편이었던 그 아이나 내가 교복입고 할 수 있는 일이란 함께 걷는 것 밖엔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왕복으로 다니면 고생도 들 했겠건만
그 정도의 융통성이 어린 우리에겐 없었다.
그룹과외 하시던 선생님의 강의 펑크로 갑작스럽게 생긴 빈틈의 시간이었다.
그 아이의 정거장에서 갑작스런 제의와 나의 수락으로 인해 생긴 기회이었기에
정거장 사이를 계속 걷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편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아이에겐 나에게 주려고 했던, 몇 날째 가지고 다녔다던 그 책을 전해 줄 절호의 찬스였고.
그 날이 처음 우리가 단 둘이 만난 날이자 마지막 만난 날이었다.
그 아이는 전에도 그랬지만 그 날 이후부터 더욱 더
나에게 친절하게 하는 남자애들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내었고,
난 그날부터 그 아이에게 일부러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둘만의 시간을 공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를 당기는 어떤 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못되게 굴었고 차갑게 대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대학을 갔었다.
그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학교는 아니지만 공과대학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친구틀 통해 들었고
그 친구를 통해서 만나자는 이야기가 들어와도 난 무시하여 버렸다.
난 누가 날 좋아한다 해서 그 사실로 나의 사랑을 만들어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당시 꿈 많은 소녀적 환상이고 소망이었겠지만, 난 나의 대단한 사랑을 기다리며 살고 있었다.
교회 일과 맹인 선교봉사 써클과 학교 공부로 바쁘게 생활하고 있을 즈음
어느 날 내 어머니로부터 그 날 있었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몇 일 동안 계속해서 전화오는 남자 아이가 있었고
한참동안 아버지와 통화를 하였다는 것이었다.
어느 학교에 다니는 누구이며 나를 고등학교 다닐 적 과외에서 알게 되었다고 밝히며
자신이 며칠 있다가 군대를 가기에 꼭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군대를 다 마치고 나와서 그때 연락하여 만나고
그땐 집에도 한 번 놀러 오라고 하셨다 했다.
그 다음 해 나는 학교를 졸업했고 우리집은 갑작스럽게 부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내가 그 아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은 어머니께 들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결혼 직전에 다니던 학교로 나를 확인하러 심부름을 보낸 사람이
고등학교적 그 아이였을 것이라 짐작은 해 보지만,
어떻게 내가 그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왜 직접 확인하러 오지 않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여튼 나의 사춘기적 두근거리는 풋사랑 비슷한 기억을 남긴 아이임엔 틀림없고,
어지간히 엇갈리기만 했던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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