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기억
그 소식을 듣던 날도 오늘과 같이 흐린 날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교수님의 자살 소식은 나에게 너무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영양사 자격시험을 앞두고, 독신이셨던 교수님 사택에서 친구와 두 달 가까이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되었던 분이셨다.
강원도 평창에 있던 SDA 아치네 마을를 들르셨다가
"네가 심고 갔다던 감자밭의 감자들을 오늘 수확하면서 묘한 기쁨을 느꼈다"고
자상하게 글을 써 내려가셨던 편지를 불과 몇 달 전에 받았기에
그분의 돌아가심 아니 그분의 자살 소식은 더더욱 놀라울 수 밖에 없었다.
말 많은 여자애들 사이에는 첫사랑에 실패하셔서 독신을 고집하신다는 소문도 있었고,
공부만 계속 하다가보니 결혼할 시기를 놓쳐서 원치 않는 독신이 되셨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소문보다 난 그 교수님의 사상의 세계가 좋아 그분의 생각에 관심이 더 있었다.
교리를 따르기 전에 성서적 이해를 먼저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셨기에, 그분의 신앙 생활엔 항상 여유가 있었다.
틀에 박힌 교회의 규율과 생활 원칙들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겐 자유분망한 것 같아 보여도
사실은 성서 중심 사상에 깊숙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그 안에서 자유로운 그 모습이 늘 보기 좋았다.
난 그 분을 개인적 많이 좋아하여 교수님댁에 머물렀지만, 그 당시 많이 내성적이었던 난,
기회가 있어도 부끄러워 스스로 피하고 말아 정말 깊이 있는 대화의 기회들을 다 놓치고 말았다.
동이 트기 전 으스름한 빛이 하늘을 덮고 있을 즈음이면 늘 스탠드 불 밑에서 성경을 보고 계셨고,
주무시기 전에도 마찬가지였었다.
물질적인 것에 욕심없이, 종교와 학문에만 열중하셨던 그분의 책상 한켠엔 십일조가 항상 따로 구분되어
놓여 있었다.
늦게 일어나 친구와 함께 아침을 못 먹고 학교에 나간 날에,
아침에 구운 빵과 우유를 챙겨 교수실로 가져오셔 아침을 챙겨 먹이려 하셨던 자상스런 분이셨다.
그렇게 자상하시고 어느 순간도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셨던 그분의 모습 속에,
보이지 않는 우울함이 존재하고 있었을 사실의 무게가 너무 가슴 아파,
친구와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말을 잃었었다.
지금은 돌아가셔서 나의 기억 속에서나 얼굴을 뵐 수 있는 분이시지만,
지적이며 항상 진지하며 따뜻하셨던 그분은 내 눈엔 참 멋진 분이셨다.
우리들 눈으로는 부족할 것 하나 없어 보였던 그 생활이 행복하지는 않으셨다는 사실 하나만
내가 아는 것을 끝으로,
내가 좋아했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 그리 가까이 다가가보지도 못하고,
영원히 이별하게 된 그 교수님이 생각 날 때면 늘 우울해진다.
그 사실과 함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 하면 할수록,
기쁨보다는 나의 내면 안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으로 우울하던 그 때를 돌아본다.
완벽한 안식일 준수를 위한 생활을 위해, 전도를 나가도 우리 교회 선전 뿐인 전도라는 사실이 씁쓸했고,
성경을 읽으면서 안식일을 마무리 하고 싶은 마음으로, 성경은 들고 앉았으나 성경 내용이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아 시간 떼우기식 연출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는 그 생활을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그 생활이 그 당시 나의 상황에서의 최선이었다.
영적 건강에 해로운 것이라 일컬어지는 세상적인 것들과의 결별로,
겉모습은 제법 경건하게 절제된 생활로 유지되던 나의 신앙생활에
진정한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던 나는,
그 조직 속의 보이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스스로 그 이방인임이 외로워졌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핀잔을 들어가며 채식주의자로 인정을 받아낼 때까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집안의 그 어떠한 일에도 제외되는 인식을 가족들에게 심을 때까지,
내가 영적으로 싸워 이겨야 할 목표를 향하여 달려나갈 때까지는,
성취감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대한 충성인줄 오해하고 있을 때까지는,
그것이 그리 공허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의 환경으로 자리잡고 나서는 공허감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었다.
교회의 조직 규율 속에 깊숙히 들어가면서 남들이 느끼는 소속감에서 오는 안정감에 나는 만족할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배웠던 나의 행동을 한 뒤의, 스스로의 만족감이 초라해지기 시작하였다.
금식 기도를 하는 마지막 날 쯤엔 거의 탈진 상태가 왔다.
그러면 눕게 되었고 잠이들어 나와 약속한 시간을 채우고 나서는,
마음 한 쪽에는 금식 기도를 마쳤다는 성취감과 마음 한 쪽에서의 공허한 웃음은
내 마음 속의 전쟁이었고 그 전쟁 중에 평화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평온하게 신앙생활하는 친구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으니 솔직히 난 내가 우울증을 가진 것은 아닌가 스스로 걱정스러웠다.
그러면 그럴수록 생각을 피해 도리어 교회의 활동적인 일 속에 더 파묻혀 들어갔다.
일에 몰입하다 보면, 적어도 내가 아는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으로는 안심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사고 방식이었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하는,
우리의 행동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는 식의 유치한 발상 말이다.
일 중독 환자처럼 무엇이 그당시 나를 그렇게 내몰고 있었을까?
그 분에 대한 사랑을 더듬으며 감사하고 그 사랑에 따라 나서는 행복한 자녀의 모습이 아닌,
일하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불안한 노예처럼 나는 무엇인가의 힘에 눌려
스스로를 내 몰고 있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들이다.
교회의 교리로 성경의 말씀들이 짜집기 된 옷을 입고 불편해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건만
필요없이 자학하던 그 때가 바로 엇그제 같기도 하고 까마득한 것 같기도 한 것이
이젠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는 것을 증명한다.
오래 전 내 안의 불꽃 튀던 전쟁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깊이를 몰라 진정한 믿음이 생기기 전에
행동으로 그분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려 하였던,
이미 고갈된 우물에서 시원한 생수를 건저 올리려 뚜레박 바닥 끄는 마찰에의한
작은 불꽃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