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2022. 10. 14. 13:49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김창호 지음(예랑 출판)

 

1.

뮈토스는 흔히 신화로 번역하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서사구조를 띠기에 내러티브(narrative)다. 신을 주체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신화다. 본래 왕족이나 영웅 혹은 신이 '말하다'는 의미의 '뮈테오마이'에서 명사 '뮈토스'가 유래했다. 타고난 이야기꾼에 의해 감성을 자극하는 극적 요소들이 가미된다. 직관과 감성을 동원해 흥미를 유발하고 줄거리가 있는 서사를 담아 전승한다. 성서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고 한다.(딤전4: 7) *하나님의 진리와는 다른 어리석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에 솔깃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말에 스스로를 훈련시키십시오.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도움을 주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훈련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 경건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뿐 아니라, 앞으로 올 세상에서의 생명도 약속해줍니다.* 성서는 온통 이야기로 기록되었다. 바울의 신화를 버리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성서는 공교히(궤변을 꾸며) 만든 이야기일까? 신화에 매몰되면, 그러니까 이야기에서 로고스를 읽어내지 못하면, 신화에 빠진 거고 그럴 때 망령되고 허탄한 게(딛 1: 14) 되고 만다.*그들이 유대인의 지어 낸 이야기들에 더 이상 귀기울이지 않고,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명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화는 봉한 샘이고 덮힌 우물이고 로고스를 함장하고 있는 판도라 상자다. 인을 떼어 봉함이 풀릴 때마다, 우물의 덮개가 열릴 때마다 로고스는 홍수를 이루고 심판을 완성하고 생명의 꽃을 피운다. 뮈토스, 오늘까지 살아남아 전승되는 이야기는 단지 흥미롭고 말초적인 것이어서가 아니다. 고대 사람들에 의해 전승된 이야기는 깊은 영성과 더불어 후대의 철학에서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영적 지혜를 담고 있다. 뮈토스와 로고스는 서로 상충하는 게 아니다. 대립은 더더욱 아니다. 오늘 우리는 이야기를 잃어버리고 산다. 뮈토스는 로고스를 길어내는 샘 근원이다. 왜냐면 오늘의 나는 어제에서 왔기 때문이다. 어제의 유산으로부터 오늘의 내가 있기 때문이다. 어제는 과거가 아니다. 이야기로 오늘 내게 다가와 대화를 청한다. 무엇으로 성서의 뮈토스 속 옛사람들의 예지와 만날 수 있을까? 성서의 아름다움은 옛사람들의 이갸기 곧 뮈토스가 문자로 기록되어 오늘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생성되던 때와 전승 과정에서 영적인 깊이와 무게가 더해진다. 뮈토스는 전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라고 말할 때의 로고스는 요한복음의 로고스를 일컫는다.(요1: 1)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이점이 분명해져야 우리는 에덴의 '뮈토스'에서 길어 올리는 로고스를 비로소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에덴의 로고스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요한복음의 로고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피려 한다. 에덴 이야기에는 신화적 요소들이 가득하다. 신(야웨 엘로힘), 자연, 사람, 결혼, 나체, 뱀, 뱀과의 대화, 생명, 선악, 질투와 분노, 형제 살인 이야기 등, 소위 신화적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를 이야기로 읽지 않고 역사적 사실로 굳게 믿고 또 믿고 있다. 하여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로고스는 매장, 매몰 되고 만다. 신화 그 자체에 빠지게 되면 야기되는 현상이다. 인류 지혜의 산물인 경전은 신화적인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모세 오경은 물론 신약의 사복음서 역시 신화적 기법의 이야기로 기술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뮈토스는 로고스다. 로고스는 동시에 뮈토스의 형식을 의존한다. 로고스로는 로고스를 결코 다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신화적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고 주어가 엘로힘으로 되어 있지만 뮈토스(신화) 형식을 빌려 로고스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서 새로운 이야기는 생성되고 로고스와 뮈토스는 is, was, will be 의 형태로 여전히 우리 곁에서 숨 쉰다. 주어가 엘로힘으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이야기의 생산자는 거룩한 영성자, 곧 사람이라는 점이다. 즉, 모든 신화적 이야기에 현혹되어 '나'를 소외시켜놓고 이야기를 읽게 되면 미신에 사로잡힌 인생은 종교적 판타지에 예속되고 만다. 인류는 언제나 자기가 생산해 놓은 이야기의 판타지 뮈토스에 빠져 로고스를 잃어버린다. 창세기 1장의 이야기 생산자는 사람이다. 에덴 이야기 생산자도 사람이다. 거기 신의 이야기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신학적 현란함으로 더 이상 인생을 기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뮈토스에서 '호 로고스'를 만날 때 '뮈토스'는 위대한 빛이 된다. 모든 신화는 그렇게 만나는 지점에서 인생을 신의 아들로 안내한다.

 

2. 

우리의 언어는 이미 타자에게서 왔고 의식의 세계 역시 타자에 의해 타자의 언어로 일깨워졌고 타자에 의해 형성된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수많은 감각 중 청각을 통한 소리와 음성언어다. 물론 단지 청각만이 아니다. 온몸의 모든 감각을 사용하지만 특히 언어를 통해 의식의 감각이 일깨워진다는 점이다. 이때의 언어는 그 사회의 문화와 전통과 집단 무의식의 총합이 깃들어 있는 전통 언어다. 생존을 기본으로 한 약육강식의 언어가 내 대뇌피질의 신경망에 반복해서 들려지고 언어 감각과 생각의 기능들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언어는 나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의 언어다. 비록 나의 언어 감각기관을 통해 발성이 이뤄지고 발화가 된다 하더라도 이는 마치 앵무새와 같이 타자의 언어를 반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앵무새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단순 재생이 아니라 깃들어 있는 의미체계를 상호 연관하고 응용하며 새로운 의미를 확장하며 발화한다는 것이다.고도화된 지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마치 블루투스 스피커와 같이 타자의 세계를 투사하여 발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레고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말하다"가 아니라는 것, 물론 형식적으로는 주어가 나이지만 타자의 가치체계와 이념들이 들어와 나를 배후 조종해서 나로 하여금 발화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내실적 주어가 '나'이겠는가. 우리들의 언어와 의식이 마치 이같이 타자에 의해 탈취되었다는 말이다. 나는 없고 내 대뇌피질에 타자의 숨결이 들어와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내가 말을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나는 내가 아니다. 오로지 비본질의 내가 말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내가 말을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나는 내가 아니다. 오로지 비본질의 내가 말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경우 나의 말은 내 말이 아니다. 주어는 나인듯하지만 내 뇌세포의 반도체 신경망을 타자에게 내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비록 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것은 스스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인생은 마치 이와 같다. 여기서 타자란 개별적인 내 앞의 타인을 일컫는 게 아니다. 그 공동체의 문화고 전통이고 언어며 무의식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서로 다른 결들이 얽히고 설켜 있다. 그중에 먼저 들어온 이데올로기가 그 사람의 성향을 나누게 한다. 진보적 신념이 들어와 그를 배후조종하면 진보적인 사람 역할을 할 뿐이다. 보수적 이념이 들어와 지배하고 있으면 보수적 신념이 그를 컨트롤 하고 있다는 말이다. 혹은 단지 진보와 보수로 나눌 수 없는 공동의 가치들이 있다. 수많은 집단 무의 식이 들어와서 배후 조종자 역할을 한다. 이들 모두가 '타자'다. 따라서 인생은 비로소 존재 문제를 문제 삼게 된다. 내 의식은 과연 나로 존재하는가?의 문제다. 여기서 비로소 비존재를 보게 되고 내가 나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이 '無'로 드러나야 배후에 있는 절대 타자가 더 이상 배후에서 나를 조정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無무는 드러나는 것이고 체험되는 것이다. 무(無)란 이미 형성된 그 모든 의식 세계의 하우스(house)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에 대한 실존 체험이다. 십자가 경험이고 아무 것도 아님(nothingness)이고, 선악에 대한 디가우징(Degaussing  강력한 자력으로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모든 데이터를 삭제하는 기술 )이며 의식의 새로운 포맷 경험이다. 내가 없고 앵무새처럼 반도체 하드웨어만 타자에 의해 작동하고 있었다는 절망이 곧 무(無)의 경험이다. 이때 비로소 타자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없고 타자가 주인으로 있었다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다. 무(無)가 경험되면서 이때 비로소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무를 토대로 해서 나의 인식의 빛이 찾아온다. 어떤 존재? 타자로 인한 의식의 존재가 아니라, 비로소 나로 인한 나의 의식의 존재. 존재 망각이란 바로 나의 존재를 일컫는다. 존재 망각이라는 말의 중심에는 '나'의 존재 유무가 핵심이다. 이를 뒤로하고 존재자의 존재만을 탐색하게 되면 존재는 영영 드러나지 않고 숨어버린다. 내 의식이 타자로 점령된 채 비존재로 있으면서 그 같은 비존재가 존재를 탐색한다는 것은 난센스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내 앞의 컴퓨터가 컴퓨터 주인을 인식하려 탐색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존재 문제는 타자로 인해 형성된 의식이 무화(無化)되고 비로소 나로 인해 다시 세워지는 존재의 탄생을 일컫는다. 그러고서야 존재에 의해 모든 존재자는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의문이 풀린다. 나누어 보고 나누어 생각하고 나누어 말하게 되는 것이 시작된다. 그리스 언어에 나타난 이 둘의 관계를 살펴본다. '보다'는 동사를 두 종류로 나눠 볼 수 있다. '블레포( to see something physical)'가 있고 '호라오'(to see with the mind) 가 있다. '블레포'는 흔히 육체의 눈으로 나타난 것만을 보는 것이고 '호라오'는 마음으로 보기며 영적으로 보는 것이다. 즉 내적, 영적 통찰력으로 인식하는 것을 '호라오'라 한다. *그리스어 '호라오'는 영적으로 보기요, 내적인 영적 지각력을 갖고 감지하는 것을 일컫는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타자에 의해 의식이 틀 지워지고 작동되는 세계에서의 생각은 여러 가지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다. 노미조 (생각하다 think ),  도케오( to have an opinion ) 등이 있다. 그것은 생각의 기능이 작동되어 무수한 생각의 세계가 펼쳐지겠지만, 자기의 생각하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비존재의 생각이 작동할 뿐이라는 점이겠다. 밤을 새워 생각하고 골똘하게 생각하고 아무리 고민하며 생각을 해서 그의 세계를 펼친다 해도 타자의 지배 아래 작동되는 생각은 곧 생각다운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 강력한 배후 세계의 조종에 조종당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거기에서 하는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생각에는 명사 누스에서 유래한 '노에오'가 있다. 노에오의 부정사 노에인을 흔히 사유라고 번역하는데 노에인을 사유라고 하면 정확한 번역이라 하기 어렵다.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들 다수는 그리스어 부정사(영어식으로는 to + 동사원형)를 사용하고 있다. 노에인은 따라서 단지 명사가 아니요, 사유하고 있거나 사유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존재를 나타내는 에이나이도 마찬가지다. 에이미 동사의 부정사라는 사실은 단지 저기 그렇게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명사로 그렇게 있지만, 여전히 상태 동사로 지금 있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러므로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기'가 '에이타이' 의미를 제대로 살려준다. 존재는 단지 명사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부정사로 표현되거나 분사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존재론을 흔히 Ontology라 한다. 온(존재자)과 로고스의 합성어인데 여기서 온(being)이 에이미 동사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온'을 존재자로 번역하든 존재로 번역하든 동사의 의미를 품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면 그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에이미(Be) 동사의 분사 형태가 '온(being)이고 부정사가 '에이나이'(to be)다. 즉 존재라는 부정사 형이 에이미 동사에서 비롯된다. 이는 산스크리트어 살아 있는 것, 스스로 서 있고, 가고 쉬는 그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asus'에서 유래했고 하이데거는 분석한다.  노에오 혹은 노에인은 명사형 '누스'에서 유래했다. 누스는 생각하는 힘이요, 정신 혹은 '얼'을 의미한다. 누스에서 유래한 동사가 노에오( I understand, think, consider, conceive) 혹은 '얼'을 의미한다. 누스에서 유래한 동사가 노이에오다. 노에오에서 여러 동사가 파생되고 그 의미는 심화된다. 이를테면 카타노에오( consider carefully) 프로노에오( to have understanding, to think)  메타노에오( change the inner man) 번역 성서들은 메타노에오를 '회개하다' 혹은 '속사람을 바꾸라'는 의미로 번역한다. 메타노에오를 분석해보자. 메타는 '사이에' '넘어서 생각하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회개란 그 너머의 생각을 하라는 뜻이다. 즉 해설을 붙이자면 타자에 의해 지배되는 생각의 세계를 넘어서 생각하라는 뜻이 회개하라는 의미의 본질이다. 따라서 타자에게 종속된 채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기가 회개라는 말의 더 깊은 의미다. 노에오에서 노에인이 나왔다. 즉 노에오의 부정사 형이 노에인이다. 그러므로 노에인은 '생각하기'로 번역하는 게 더 적절하다. 사유(思惟)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대상을 두루 생각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스어의 본래 의미는 '생각하기'라는 말이다. '노에오'는 '내가 생각하다'이고 노에인은 '생각하기(현재 부정사 능동)'다. 여전히 동사의 의미를 살려야 한다는 게 나의 견해다. 비로소 타자로부터 형성된 비본질의 의식과 구분하여 자기 의식의 싹이 트며 시작되는 생각이 '노에오'요 '노에인'이다. 대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체를 생각하고 생각을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기'에서 '존재하기'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거기서 존재하기란 비로소 '나'를 의미한다. 존재의 '나'를 의미한다. 타인에 의해 형성된 의식이 스스로 독립적 의식의 '나'로 형성되어 감을 의미한다. 생각하기가 곧 존재하기다. 의식과 정신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저 사물 존재자의 존재를 일컫는 게 아니다. 온통 사물 존재자의 존재를 탐구하느라 정작 자기 존재를 망각하게 되고 그것은 존재자의 존재까지도 망각하게 한다. 내가 존재해야 비로소 존재자들은 존재자로 드러난다. 나는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존재하는가? 생각하기가 존재하기다.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히브리어에는 '하야(그가 있다)' 동사의 완료시상과 미완료시상의 합성어에서 야웨라는 명사가 탄생하고 하야는 그가 있다(HE IS)라면 '에흐예'는 '내가 있다( I AM)'다. 에이미 동사의 분사 '온'( being)의 여성형에서 유래한 것이 우시아( substance)다. 우시아에서 성서의 그 유명한 파루시아가 나온다. 파라 전치사와 우시아의 합성어로 함께 있다, 혹은 흔히 임재라 사용하기도 한다.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번역된 '에피우시온'도 에피 전치사와 '우시아'에서 유래한 '우시오스'의 합성어다. 따라서 '톤 아르톤 헤몬 톤 에피우시온'은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이다. 

요한복음의 '로고스'를 살펴보는 까닭은 에덴 이야기에서 로고스 읽어내기를 위해서다. 명사 로고스는 동사 '레고'에서 유래했다. 레고는 비로소 '내가 말하다'는 의미다. 내가 말하려면 타자로 인해서 형성된 의식의 세계에 무의 체험을 통해 타자를 떠나보내는 과정을 겪게 된다. 무의 토대에서 새로운 것을 보게 된다. 이를 '호라오'로 표기한다. 편견과 선입관, 앞서 자리잡고 있는 이데올로기, 진영 논리 등이 의식에 진을 치고 있으면 보아도 보지 못한다. 보는 것만을 보게 된다. 진영의 관점에서만 만물을 보고 해석한다. 편견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보고 이해한다. 헬라 사람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보는 것을 동사 블레포를 사용해 본다고 언어를 구분한다. 무의 체험으로부터 비로소 그 같은 앞선 앎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다. 무의 토대에서만 새로 보게 된다.일러 '호라오'로 표기한다는 점이다. 보게 되면서 새롭게 '생각하기'가 시작된다. 제 스스로 생각하기가 시작되면 비로소 '존재하기'가 찾아온다. 이것이 I AM 이다. 아이 엠에서 비로소 레고가 시작된다. 자기 자신이 '말하기'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여기서도 레고의 부정사는 레게인(to say 마 3: 9))이다. 동사면서 명사가 '레게인'이다. 따라서 '레게인'은 존재의 언어로 '말하기'다. 

존재의 언어로 말하기란 무엇일까? 빌려온 생각은 타인의 생각이요 제 생각이 아니다. 타자에 종속된 채 생각하는 것은 앵무새와 마찬가지로 타자를 반영할 뿐 제 생각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논했다. 무의 토대 위에서 스스로 '생각하기'는  비로소 스스로 '존재하기'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존재하는 나가 말하는 것을 일컬어 '레고'라 한다. '레게인'은 존재가 '말하기'다. 따라서 제대로 인식이 먼저 시작되면서 동시에 도대체 말하기도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서양철학의 로고스는 요한복음의 로고스와 다양한 차이를 드러낸다. 아니, 요한복음의 빛나는 통찰과는 다른 개념으로 흐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요한복음은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라고 위대한 선포를 한다. 하나님이 곧 로고스라 일컫는다. 여기서 오해가 발생한다. 로고스는 하나님이요 그 하나님은 절대자 곧 절대 타자요 무한자로 변형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그 같은 오해가 발생한다. 요한복음은 데오스란 도리어 절대자 혹은 절대타자인 신이 아니라 '로고스' 임을 밝히 드러내 주는 책이다. 그런데 역으로 읽는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데오스' 곧 하나님을 말하는 책이요, 하나님은 상상 속에서 관념으로 창조된 엄위하신 절대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로고스'가 곧바로 그 '데오스' 임을 밝혀 주는 책이라는 말이다. 그 로고스는 생각하기를 통해 존재하기가 이뤄지고 '존재하기'에 의해 '말하기'나 '말해지기'가 이뤄진다. 말하기를 통해 로고스로 드러나는 것이 신성이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책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로고스와 하나님은 비존재를 넘어선 존재의 현현이다. 

인생이 타자로부터 의식의 세계가 형성되는 것은 필연이고 숙명이다. 그를 통하지 않고 의식의 세계가 형성될 수 없다. 비록 자신이 아닌 남의 집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처음 시작된다. 부정되어야 할 집을 짓게 된다. 아무리 긍정하고 싶어도 그것은 긍정되지 않는 부정의 존재다. 부정되어야 할 의식은 누구라도 존재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다. 비존재(나 아닌 타자)로부터 시작되고 존재로 이행하기 위해 무의 소용돌이가 찾아온다. 무는 도대체 무다. 유(有)인 줄 알았던 것이 아님이 무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기 정신이 드는 사람은 없다. 로고스는 절대자를 일컫는 게 아니라 생각하기를 통해서 비로소 존재하기가 이루어진, 존재가 말하기를 통해 드러나는 근원에 깃들어 있는 증거를 일컬어 로고스라 한다. 이 로고스는 따라서 사람으로 하여금 존재하게 하는 빛이고 존재의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생명의 빛이다. 그것은 늘 현재 능동태 부정사 '말하기(레게인)를 통해 드러나는 말씀이다. 

우리말에서 말과 말씀의 차이가 있다. 흔히 윗사람들 혹은 성인이나 현자의 말은 말이라 하지 않고 새겨들어야 할 말이라 해서 말을 마음에 새기라는 뜻으로 말씀이라 일컫는다. 혹은 말은 잘 사용(말하기)하라는 의미로 말을 씀, 하여 말씀이라 한다. 우리말 용법이다. 생각하기가 존재하기요 존재하기는 곧 말하기로 드러난다. 타자의 생각과 말은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내 의식에 들어와 있지만, 이제 그것으로 형성된 의식의 세계가 무너지고 무화(無化)되면 존재의 나가 '레고' 혹은 '레게인' 또는 '디아레게인'하게 된다. 거기서 드러나는 존재의 소리(로고스)를 새겨들으라는 의미에서 정관사가 붙어 있는 호 로고스는 곧 '말씀'이라 번역해도 무방하다. 우리가 귀담아 새겨들어야 할 말씀은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소리 곧 호 로고스다. 이를 통해 우리의 '존재하기'가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여 '로고스'는 거기서 창조의 주체가 된다. 존재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 로고스'와 '존재하기'는 상호 순환적이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다고 하겠다. 존재하기에 의해 말하기가 이뤄지고 말하기에 의해 '존재하기'가 이뤄진다.

요한복음이 위대한 것은 바로 '타자에 속한 말하기'에 익숙해 있던 베드로로 하여금 마침내 타자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언어를 획득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나이다.'는 전형적인 타자의 욕망과 요구가 자신 안에 그대로 투영되어 자신의 욕망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는 동시에 로고스를 오해하고 오해된 로고스를 중심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전형적인 종교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21장에 이르러서는 다시 요한복음 14장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 사이 절대 타자인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있고 그의 절대 우상인 예수와 오해된 로고스가 무화(無化)된다. 자신의 말로 말하기(레게인)에 이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베드로전후서는 마침내 베드로가 자신의 말로 말하기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마침내 베드로로 '존재하기'를 보여주는 장쾌함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에덴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이 같은 로고스를 읽어낼 수 있을까.

 

** *요한복음의 큰 주제 중 하나가 호 로고스 곧 '그 말씀'이다. '엔아르케'는 시간부사(in the beginning)인가? 장소 부사로 읽어서는 안되는 것인가? 만일 시간 개념으로 읽는다해도 그것은 크로노스의 역사적 시간 개념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읽게되면 옛날 옛적 그러니까 물리적 우주만물이 창조되기 전의 신화적 이야기로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필연적으로 향벽설위 형식의 신을 상정할 수밖에 없게되고 지독한 우상의 신을 전제하게 되며 그럴적에는 성서 전체의 신관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성서의 신관은 성전과 성막 신이고 그 신은 성전 안에 머물고 있다는 철저한 성전 중심의 신이기 때문이다. 비록 크로노스적인 서술형식을 띠고 있다하더라도 거기서의 엔 아르케는 크로노스적 어느 시점으로 읽어가면 요한복음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도리어 엔 아르케는 현존재 의식의 근원성으로, 영에 속한? 카이로스적 시간의 근원으로, 초시간적 공간 개념으로 읽어가야 한다. 성서의 언어로 환원하면 이곳은 지성소라 하겠다. 성서는 지성소를 신이 머물고 있는 집이요 그곳에서 빛을 발출하며 창조의 일을 하는 것으로 지시하기 때문이다. 호 로고스가 머물고 발출되는 근원적인 곳이다. 하여 엔 아르케는 단순한 시간 부사 이상이라는 말이다. 이 점에서 현대신학의 요한복음 읽기는 신학적 빈곤과 결핍이 뚜렷하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호 로고스가 엔 아르케에 머물면서 그것의 있고 있어 왔으며 여전히 그렇게 있을 존재 양태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이미 동사의 미완료시제인 '엔'은 그것을 아주 잘 드러낸다 하겠다. 그러니까 물리적 우주의 창조 싯점 이전에 말씀이 미완료시제로 있어왔다는 방식의 읽기는 단언하건데 확실하게 극복해야 한다. 근본주의에서는 전혀 엄두를 낼 수 없는 방식이지만 요한복음을 그런 점에서 다시 읽어내야 한다. 아쉽지만 한국의 신학 풍토상 교회밖에서만 그 같은 시도가 가능하다. ***

 

3. 

대지의 어머니 비나(총명, 이해)는 타자 자아로 점철된 타자를 향하여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된다. 이때의 시선이란 타자 자아(0thers ego)의 시선이 아니라 존재 자아의 시선이다. 타자를 향해서도 이해의 빛을 발휘한다. 약육강식의 시선, 경쟁과 갈등의 대상으로 바라보는데서 벗어난다. 도리어 타자 곧 그도 존재 자아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타자 자아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한다.   이해 곧 비나는 기준을 해체한다. 기준은 늘 비판을 수반한다. 나의 기준은 내 눈에 박혀있는 들보다. 인간이면 이래야 된다는 최소한의 기준 조차도 비판과 비난의 근거로 작용하는 들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힘과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법이 작동한다. 허나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드레스( endless)다. 총명의 눈은 들보를 빼내고 타자를 향해서도 비로소 존재로 대하게 된다.   하여 이해는 긍휼을 낳는다. 자비를 낳는다. 배타심을 해체하고 자비심을 잉태한다. 생명나무는 케세트의 꽃을 피워내고 열매 맺는다. 인자(케세트)와 진리(에메트 알레데이아)는 짝을 이룬다. 진리(알레데이아)는 은혜(카리토스)와 함께 동반한다. 따라서 이해를 수반하지 않는 깨달음, 긍휼한 마음이 부재한 지식은 교만을 낳고 북방 곧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강퍅함을 낳고 배타를 낳고 심판을 낳고 분쟁을 낳고 갈등을 낳고 사망을 낳는다.    도그마는 그 안에 사망을 배태하고 있다.   깨달음은 깊은 이해, 존재 아래 서 있는 총명을 통해 숙성되고, 거기서 이해는 만물의 어미가 된다. 이해가 낳는 것은 하여 자비심이다. 자비심은 이해가 낳은 위대한 아들이다. 하여 케세드(자비)는 동시에 가돌림(그돌라)의 복수, 큼, 위대함이다.   따라서 존재 자아는 단지 깨달음이나 이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케테르와 깨달음, 그리고 이해는 이제 단지 존재 자아의 머리가 형성되었을 따름이다.  존재 자아의 몸은 케세드(그돌라)에서 시작된다. 케세드의 어미는 비나(이해)요, 비나는 케세드를 잉태하고 낳는다는 점이다. 존재 자아의 빛나는 특징에서 몸을 이루는 것은 자비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비나(이해)가 어머니라면 자비는 비나가 낳은 것이고 그 근원이 지혜요, 이해이기 때문에 결코 윤리와 도덕의 당위법이 아니다. 만든 율법과 계명을 좇는 게 아니다.   목숨을 바쳐 사랑하겠다는 인위의 법이 될 수 없다. 존재 자아의 크기와 성숙, 그 존재로 드러나는 꽃이고 향기일 뿐이다.

 

성서는 야웨 엘로힘이 숭배의 대상이라는 책이 아니라, 창조의 주체라는 것을 강조하는 책이다. 이때 창조란 우주 창조를 일컫는 게 아니다. 우주는 단순히 비유일 따름이다. 따라서 지금도 여전히 창조의 주체는 야웨 엘로힘이다. 숭배가 아니라 도리어 믿음이어야 한다. 얼이 얼사람을 낳는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정신이 정신을 낳는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낳는다. 믿음이어야 하는 까닭은 모든 정신의 주체는 지성소에 있는 지극한 정신의 존재인 하나님이 지극한 마음의 나를 빚고 창조해간다는 사실이다. 신령이 신령을 낳는다. 그러므로 믿음이어야 한다는 뜻은 언제나 지극한 존재를 향해 나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지극한 마음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엘레 톨도트 하샤마임 베하아레츠(창 2:4)- "이것은 하늘과 땅의 낳고 낳음이다."로 번역해 볼 수 있다. 70인역은 "아우테 헤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우라누 가이 게스"로 번격한다. 마태복음 1장 1절은 '헤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예수 크리스투'라고 시작한다. 신약성서는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책'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창세기 2장 4절은 '하늘과 땅의 계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둘은 서로 병행 구절이다. 따라서 이후 전개될 에덴의 이야기는 '하늘과 땅의 낳고 낳고'에 대한 것이다. 마태복음도 에덴 이야기도 계보기라는 점에서 동일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계보'라는 표현에는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표현이 중첩되어 있다. 거기에는 동시에 우리 '각각' 그 정신세계가 어떻게 새롭게 낳고 또 낳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 곧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서려 있음을 읽어내야 한다. 생명책에 녹명(錄名)되어 있다는 계시록의 표현도 이 같은 점을 지시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 4절에 나오는 '톨도트(계보)를 설명하기 위해 이어서 등장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세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데, '바라(창조하다, 낳다)'와 '아사(만들다, 양육하다)'와 '야차르(조성하다) '다. 계보(톨도트)를 이어가는 중요한 행위의 세 단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흔히 '창조하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라'는 낳고 낳고에 포섭되는 단어다. 즉, create라는 의미의 '바라'는 사실 'born' 혹은 'give brith'의 의미가 함의되어 있고, 'produce'의 의미가 담겨 있다. 동시에 '바라'와 '아사'와 '야차르'도 모두 톨도트에 포섭되는 개념들이다. 계보를 이어가는, 족보를 형성해가는 개념적 동사들이다. '바라'가 '낳다'라면 '아사'는 '양육하다'에 상응하고 '야차르'는 성숙한 인격으로 '조성해가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세 동사는 '톨도트(계보)'의 술어들이다. 에덴 동산의 '경작하다'에 도 포섭되는 동사들이다. 창세기 2장 4절과 같은 문장 구조를 띠고 있는 창세기  5장 1절은 다음과 같다.   아담의 계보는 이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어내시던 날, 하나님께서는 당신 모습(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시되(공동번역)  2장 4절의 하늘과 땅이 여기서는 아담으로 치환되었다. 하늘과 땅은 아담을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책(세페르 톨도트 아담, 세페르는 마태복음 첫 단어 '비블로스)' 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을 뿐이다. '바라'는 '창조하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곧 '낳는 것'을 뜻한다. 하여 '낳는 것'을 '창조'라 일겈도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직역하면 이렇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담을 낳고(바라) 하나님의 모양으로 그를 아사(양육)해 가는 날, 아담의 계보의 책이다." 성서 이야기들의 숨어 있는 코드라고 할 수 있겠다. 요한계시록의 첫 시작은 '아포칼룹시스 예수 크리스투'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드러남이 요한계시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책'이라는 마태복음도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는 땅에 상응하고 그리스도는 하늘에 상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