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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에덴의 인물들과 생명의 계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2022. 10. 11. 12:52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김창호 지음 (예랑 출판)

 

아담 안에는 아브람과 아브라함 두 남자가 있다. 하와에게는 하갈과 사라 두 모습이 있다. 하와는 뱀의 씨를 받았다. 뱀의 말은 이미 하와에게 들어갔다. 선악의 씨를 먹었다. 아담도 함께 먹는다. 창세기 3장의 드라마다. 뱀의 씨를 받은 아담과 하와는 먼저 '가인'을 낳는다. 그러므로 가인은 뱀의 씨인 셈이다. 뱀은 타자의 원리다. 타자가 내게 뿌리고 가는 외부의 원리다. 타자의 지혜요 타자의 가르침이다. 인생은 누구나 타자의 삶의 지침이 먼저 온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게 에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뱀의 말은 타자가 던져주는 삶의 지식을 상징한다. 선악으로 태어난 '나'가 '가인'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예언이 있었다. "아파르(흙)니 아파르(흙)로 돌아가게 되리라." 이는 생명의 약속이다. 약속을 따라 난 이가 또 다른 두 번째 아들 '아벨'이다. 인생은 언제나 이 두 형상을 낳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두 형상이다. 이 또한 예외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처음엔 가인이 득세한다. 하여 가인은 아벨이 숨쉴 틈을 주지 않는다. 처음 가인의 형상의 '나'가 아벨의 형상인 '나'를 해치고야 만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지만 아담은 가인을 들판으로 내보내고 아벨을 대신해 셋을 다시 낳는다. 가인과 아벨의 치열한 갈등 구조 속에서 아벨이 죽고 가인은 집에서 쫒겨나 가인의 가계, 가인의 계보를 이뤄간가. 가인과 아벨의 갈등과 셋이 태어나는 여정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예언의 성취다. 다시 아파르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순례의 길이라는 말이겠다. '바라'와 '아사'와 '야차르'가 다시 새롭게 진행되고 있고 바빌론에서 다시 고토로 돌아와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는 서사와 같은 이야기 구조를 띤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인들의 이야기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인간의 내면에는 뚜렷한 두 개의 계보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남성성으로는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있고 여성성으로는 사라와 하갈이다. 동시에 아브람은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고 아브라함은 사라를 통해 이삭을 낳는다. 의식의 갈등과 분화의 시기를 거쳐 자유와 사랑의 형상과 모양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에덴 이야기에는 이미 아브라함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얘기다. 출애굽 이야기가 에덴 이야기에 이미 담겨 있다는 말이다. 아담은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잃은 셈이니 둘로 나타나는 자아 이해, 그 같은 실존 인식의 시기를 넘어서게 된다, 소유 구조(가인)로 형성되었던 자아 이해와 그 모든 것이 공이라는 자아 이해(아벨)조차도 넘어서게 된다. 이후 아담과 하와는 마침내 셋을 낳는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 곧 선악의 지식이 들어와 낳은 맏아들니 소유 세계의 가치를 정체성으로 삼게 되고 이것이 곧 정(正, these)이 된다. 인생은 누구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음 모두는 소유에 목매게 된다. 아는 게 힘인 까닭은 지식이야말로 자신을 지켜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찌르는 칼이며 동시에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패다. 하여 카인은 '작살, 찌르는 창'의 의미도 이름에 담고 있다. 모든 토론을 살펴보라. 이웃집 부녀자들의 수다를 살펴보라. 또래 집단이 모여서 나누는 대화를 살펴보라. 찌르고 막고 또 찌르고~ 곧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이용해 찌르며 쾌감을 얻고 찔리며 열패를 맛보면서 기운을 돋우거나 기가 빨리거나를 반복하는 게 인생이더라. 재물과 권세는 지배구조를 형성하고 서열을 나누는 척도로 역할을 하니 거기에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려 한다. 그렇게 형성된 처음 자아, 그게 에덴 이야기에서는 아담의 맏아들 가인으로 형상화된다. 

인생의 정신은 결코 가인으로만 머물 수 없게 된다. 가인은 정글의 제일 법칙에 충실한 정체성이지만, 거기는 늘 피가 흥건한 곳이고 기싸움의 세계고 힘 있는 자를 중심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곳이어서 쉼이 없고 언제나 피곤하다. 더 큰 힘으로부터 배척당하게 될 두려움으로 인해 더욱 힘을 키워야 하는 정체성이다. 긴장이 있고 수고가 있는 자리다. 바닷물을 삼키면 더 갈증이 심하듯, 지식은 아무리 채워도 또 다른 갈증일 뿐이다. 하여 이 모든 게 헛되고 헛된 것이라는 또 다른 소리가 찾아오게 된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가인에 대한 강력한 부정 의식이 형성된다. 이름하여 반(反)이다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은 아담의 두번째 정체성이다. 이 모든 게 헛되고 헛되다는 새로운 세계 이해다. 물론 아직 집안에는 맏아들 가인이 있고 동생 아벨이 있다. 아담의 두 번째 정체성인 아벨은 새로 찾아온 또 다른 세계관이다. 이 모든 게 헛되고 헛되다는 내면의 소리다. 가인에 대한 부정이고 첫 번째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 조금씩 깊어간다. 단칼에 가인을 베어내는 게 아니다. 가인은 아벨의 형이다. 처음의 정체성이 적어도 두 번째 정체성보다 더 강력해서 가인은 그리 쉽게 부정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부정은 시작되고 잇다. 이를 일러 갈등이라 한다. 갈등이란 처음의 자아와 두 번째 자아 사이의 투쟁이다. 나는 처음 자아를 타자 자아(others ego)라 명명한다. 타자 자아는 부모와 전통으로부터 전해지고 나의 육체의 본능이 수용하고 복제해서 형성된 자아다. 에덴 이야기에서는 가인으로 형상화된다. 따라서 가인은 모든 인생의 처음 자아, 타자 자아로 머물 수만은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불안은 타자 자아의 정체성에 머무는 동안 겪게 되는 본질적 몸살이다. '자기 부재'에서 비롯되는 존재적 '불안'이다. 그러므로 더 큰 힘으로부터 받게 되는 억압으로부터 늘 불안이 찾아온다. 불안은 가위눌림이요, 존재 자아 부재에 대한 자명종이다. 인생이 겪게 되는 존재적 불안은 곧 자신이 타자 자아의 정체성에 머물고 있기에 겪게 되는 홍역이다. 타자 자아의 정체성에 머물고 있기에 겪게 되는 홍역이다. 타자 자아는 헛된 것이고 소유가 아니라 도리어 텅빔, 곧 공(空)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에덴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 아벨로 형상화된다. 갈등은 불안이 아니다. 불안은 갈등의 불쏘시개요 원천이며 토대다. 불안은 존재 자아 부재로 인한 것이고 갈등은 타자 자아와 존재 자아의 투쟁이고 다툼이다. 존재론적 갈등은 타자 자아와 존재 자아 사이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가인과 아벨의 두 정체성 사이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뿔싸, 인생은 가인이 그러니까 처음 형성된 정체성이 두 번째 형성된 정체성을 짓밟아버린다. 이 모든게 공이고 헛되고 헛되다는 정체성은 그 싹이 자라나다가 묵사발이 되고 만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여버린다. 에덴 이야기에는 극적 요소가 곳곳에 배치되고 있다. 에덴 이야기의 생명력은 그 같은 극적 요소가 적절히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형제 살인 이야기가 모세 오경 창세기 두 번째 이야기의 서사구조에 들어 있다.그러고 보면 청소년 관람불가 19금 딱지를 부쳐야 하는 책이다. 갈등은 봉합되고 처음 정체성의 승리로 끝나게 될까? 아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는 게 아니다. 갈등은 그렇게 봉합되는 게 아니다. 처음의 정체성 가인은 아담의 집에 머물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그렇다고 처음 정체성으로 돌아가 다시 가인으로 살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게 아벨 곧 안티테제(Antithese)요 의식에서 일어나는 정신의 현상이다. 아벨은 죽게 되고 가인은 쫒아내고 아담은 셋을 낳게 된다. 두 번째 정체성, 헛되고 헛되다는 것이 찾아와 공(空)을 이루고 있지만, 이마저도 가인으로 인해 죽어버린다. 즉, 반(反)이 반(反)으로만 머물게 되지 않더라는 말이겠다. 아담은 마침내 셋으로 종합되고 아담의 두 아들 또한 셋으로 통합된다. 물론 가인은 쫒겨나 유리하는 존재로 여전히 남아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 아들이 셋으로 통합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고, 그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 25) 고 기록한다.   

여기서 비로소 존재 자아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타자 자아 부정(아벨)의 과정을 거쳐 존재 자아(셋)를 낳는 여정이다. 헤겔이 말하는 정신현상학에서의 정반합 논리는 결코 수학적 논리학이 아니다. 정신이 새로운 정신을 낳고 또 낳아서 마침내 절대 정신, 곧 무엇에도 억압당하거나 가위눌리지 않고 동시에 그 누구도 억압하지 않는 온전한 자유 정신을 구현해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에덴 이야기에는 비로소 사람들이 야웨(나다운 나의 신성성이 곧 야웨)의 이름을 불렀다고 서술한다.

창세기 1장 창조 설화 여섯째 날 사람 창조 이야기가 에덴 이야기에서는 마침내 5장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셋이 태어나면서 아담의 바라와 아사가 완성되어 나타난다. 셋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태어나고 거기서 사람은 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바라(낳고)'되고 '아사(양육)' 된다. 사람은 마침내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달리 표현하면 '비로소 사람'이 창 2장 7절에서 시작된다면 창세기 5장에서 '사람다운 사람'이 완성된다. 그리고 '사람다운 사람'의 계보가 이어진다.

셋은 사람의 아들이며 인자, 곧 '하벤 하아담' 그 사람의 그 아들,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이 된다. '그 사람의 그 아들'은 곧 가인도 아니고 아벨도 아니고 '셋'이어야 하는 게 거기에 있다. 에덴 이야기에 담겨 있는 사람 창조 이야기, 창조 신화(창세기 1장 창조설화)의 에덴 버전이다. 셋은 아담의 정신이 가인과 아벨의 변증법을 거쳐 새로운 종합(synthesis), 절대정신의 형상, 거룩한 정신, 한 얼로 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종합되어 새로 태어나는 역동적 순례의 결과물이며 여정이다. 정신이 거듭거듭 새로 태어나는 이야기, 생명의 계보학 에덴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