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그룹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김창호 지음( 예랑 출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쫒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3: 24)
'하케루빔'을 그룹으로 음역했다. 케루빔은 케룹의 복수형이다. 그룹은 법궤를 덮고 있는 천사의 이름이기도 하다. 법궤는 지성소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에덴의 동편에 그룹이 있다는 진술과 일치한다. 동편은 지성소의 방향을 일컫는 말이다. 그룹의 어원은 히브리어 전치사 '케'와 마음(inner man, mind, will, heart)를 일컫는 '렙'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론한다. 물론 그 유래를 언급하는 문헌은 찾아볼 수 없으니 전적으로 사적인 견해다. 성서에 등장하는 상징물로 지성소의 깊은 곳에 법궤가 있다. 법궤에는 세 개의 귀물이 있는데, 감추인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증거판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그룹이란 휘장 넘어 법궤 속에 있는 세 귀물(貴物), 생명의 생생함이 드러나기 전에 먼저 마주치는 상징물이다. 법궤를 덮고 있는 뚜껑 위에 조각된 두 천사의 이름이 케룹이다. 이를 성서는 속죄소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케룹의 상징은 무엇을 일컫는 것일까? 창세기 3장 후반부에서 언급하는 두루 도는 화영검과 그룹은 에덴 이야기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에덴의 동편에 두루 도는 화영검과 케룹이 해명이 되어야 이 신화적 서술 속에서 우리는 로고스를 제대로 읽어 낼 수 있으리라.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열매에 경도되면 결코 생명 나무의 길로는 나아갈 수 없다. 성서의 방식으로 하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가로막힌 담이 있다.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가로막이 있다. 휘장이다. 이 휘장을 거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게 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육체의 예법은 모두 휘장에 속한다. 예수의 육체를 일컬어 휘장이라고도 서술한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 20)
여기서 예수의 육체 또한 상징이고 비유며 징조(sign)다. 제자들의 관점에서 예수의 육체란 예수를 육체의 법을 따라 이해하려는 가치체계의 세계를 일컫는다. 영적 지식이 육체의 자랑이 되어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그에 반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대표적인 경우다. 예수의 육체란 예수를 세상 임금으로 삼으면서 그에게 투사하여 구현하려는 그 모든 욕망의 총화를 일컬어 육체라 하는 것이다. 육체의 욕망이 작동하는 시스템은 선악을 기반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결코 생명의 법칙 영역에 나아갈 수 없도록 막아놨다는 뜻이기도 하다. MS 도스에서 운영되는 프로그램은 결코 윈도우 운영체계에서 작동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정신은 두 가지 운영체계 위에서 작동된다. 옳음과 그름을 나누고 시시비비와 선악을 나누는 것에 반응하고 그에 상응해서 의식이 작동하고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여기서는 오로지 육체의 예법이 중시되고 삶의 궁극도 도무지 옳은 삶을 지향한다. 여기서 옳음은 저마다 달라서 결국 옳음과 선을 경쟁하며 아비규환을 이룬다. 나의 옳음으로 너의 옳음을 심판하고 악이라 규정하고 결국 그를 죽여야 내가 살게 되는 까닭에 약육강식 동물의 세계와 다름없다. 자기 깨달음, 영적 지식을 준거로 상대를 배제하고 살해한다. 사망으로 이끈다.
그 의식과 정신세계가 생명의 빛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하여 이러한 삶의 방식이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장애물이고 에덴으로 들어갈 수 없게 하는 불 칼 곧 화영검이다. 화영검이란 결국 육체요 선악의 가치체계다, 예수의 육체란 그를 육체로 좇던 제자들에 의하면 선의 정점이고 구세주요 세상 임금이다. 세상 임금이 죽어야 선악의 비늘이 벗겨진다. 자신의 내면에 구성된 선의 정점인 가치체계가 하나님으로 상징되든 부처님으로 상징되든 예수로 상징되든, 그게 무어이든 바로 그 가치체계가 곧 휘장이고 화영검이고 육체의 법칙에 따라 형성된 자기 정신이니 곧 선과 악으로 내면화된 자기 자신인 셈이다. 에덴의 생명 나무로 나아갈 수 없게 하는 최대의 걸림돌이다.
그룹(케루빔)이란 회장을 걷어내고 지성소에 들어갔더라도 다시 마주치게 되는 법궤의 뚜껑에 조각된 두 천사다. 선악의 세계를 벗어나야 비로소 인생은 죄라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룹을 마주하며 죄를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왜냐면 선악의 세계가 아니기에 거기에는 옳음도 그름도 없기 때문이다. 하여 이곳을 구약성서는 속죄소라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의 물음인 그룹이란 무엇일까? 여기서 그룹은 '케렙(마음과 같은)'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비로소 성립한다. 단지 가설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타당한 추론이 성립된다는 걸 알 수 있다. 곧 아비와 같은 마음(케렙)을 일컬어 두 천사로 상정했다는 것이다. 그룹이란 아비의 마음과 자녀의 마음이 하나로 만나고 거기서 형성되는 지혜와 총명의 신성성을 일컫는다는 말이다. 이를 하나님의 마음이라 할 수 있고, 하여 케룹은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을 의미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새언약인 아비의 마음과 자녀의 마음이 같아질 때 비로소 그룹 천사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성소의 휘장을 걷어내고 지성소에 입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서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두 천사는 하나님의 마음과 아들의 마음이고 하나로 만나면서 새 언약이 성취되는 곳이어서 속죄소가 된다. 거기서 그룹이 생명나무를 지키고 있는 까닭이 성립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아들의 마음이 도래하기 전에는 결코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다른 한편 케렙(그룹)은 새로운 의식의 싹인 호크마(지혜)와 비나(명철)기도 하고, 케세드(자비)와 게부라(권세)기도 하다. 이를 히브리인들은 야웨로, 혹은 야웨 엘로힘으로 부르니 천사인 동시에 엘로힘이다.하여 그룹은 하나님의 마음(케루빔, ~와 같은 마음들)을 갖게 될 때를 상징하는 것이다. 법궤의 뚜껑은 하나님의 마음을 통해서 열린다. 생명의 나무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얼 사람에게 열리는 세계가 생명의 세계다. 선악의 운영시스템에서 돌아가는 각종 어플리케이션은 그곳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아무리 더블 클릭해도 엡이 열리지 않는다. 생명의 원리로 그 정신세계가 작동하고 운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