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0. 갈빗대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2022. 9. 13. 15:19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김창호 지음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베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 2: 20- 23)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원문 성서에 없다.

번역과 독해의 오류다.

오독의 오랜 성경 읽기 역사는 청산되어야 한다.

육체가 남녀의 생물학적 결합으로 생명을 이어가듯

영의 세계는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향해 세우는 것을 통해 생명의 계보를 이어간다.

갈빗대 신화는 벗어나야 한다. 

흙이 아담을 만드는 재료가 아니었듯 갈빗대는 여자를 만드는 재료가 아니다.

갈빗대는 도리어 여자를 향해 세우므로 여자와 하나가 되는 원리다.

 

여자는 아담의 갈비뼈가 아니다.

성경을 왜곡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신화다.

성경을 신화적으로 읽고 신화 속에 가둬놓는 것이다.

물론 에덴 이야기는 신화적 서술방식이지만, 우리는 신화에서 로고스를 읽어내지 않으면 우리의 인식은 미신에 갇혀 있게 된다.

에덴 이야기에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구절이 없다.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하고 그렇게 번역하고 있을 뿐이다.

해석자들이 에덴 이야기를 도리어 더 깊은 신화 속으로 내모는 것이다. 로고스를 신화 속에 가둬놓은 것이다.

신화의 옷을 벗기고 로고스가 우리 앞에 존재로 그 모습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 2: 22)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을 몇 군데 살펴보면 

문장의 주어는 '야웨 하나님', 동사는 '바나' 곧 '만드시고'가 아닌 '세우다(build)'의 뜻을 지닌 '바나'다.

'바라'도 아니고 '아사'도 아니고 '야차르'도 아닌 '바나'로, 성경에서 주로 '쌓다' 혹은 '세우다'는 뜻을 지닌다.

문장의 목적어는 '갈빗대' 곧 '하체라(the rib)'다. 

 

'갈빗대로'는 '에트 하체라'인데 목적격이다. 여자를 만든 재료인 것처럼 번역하면서 '여자'를 목적어로 해석한 것이 결정적인 오역이다.

대격부호(목적격표시) '에트'까지 동원해 갈빗대(하체라)가 목적격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므로 '갈빗대로'가 아니라 '그 갈빗대를'이 맞다.

갈빗대를 설명하는 관계절을 이어서 번역하고 해석해보자.

갈빗대를 왜 세우셨을까? 그것은 여자를 위해서다.

'레' 전치사와 '이샤' 곧 '레이샤'는 여자(이샤)를 위하여로 번역하고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이는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야웨 하나님이 여자를 위하여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를 세우시고 그리고 그 여자를 아담에게로 인도하셨다.

히브리어 문장의 에트~ 레~ 용법이다. ~를 위하여 ~을 하다는 용법의 문장이다 즉 (여자를 위하여 갈빗대를 세우셨다)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번역과 이해는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성서의 진리를 신화가 되게 하는 번역이 되고 말았다.

창세기 2장 22절은 그 뜻이 남자와 여자의 참된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갈비뼈'가 세워져야 비로소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 갈비뼈는 비유이다.

 

에고는 마치 심장과 폐를 보호하는 갈비뼈와 같이 자신을 지키려는 자아인 셈이다.

그것의 출발은 타자다.

부모로부터 전해진 생존전략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이는 자신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자아의 감옥에 자신을 가둔다.

이때 존재 자아(ego)는 타자 자아(other ego)로 인해 보호되는듯하나 동시에 타자 자아로 인해 감옥에 갇혀 있게 된다.

따라서 갈비뼈를 세운다는 것은 그 같은 타자 자아의 휘장을 찢는다는 의미다.

휘장은 육체다. 여기서 육체란 그 정신이 육체의 원리를 따라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즉, 육체의 생존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기적 자아를 일컬어 육체라 하고 휘장이라 한다.

휘장은 지성소를 은폐하고 감춘다. 이는 지성소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은폐시키고 만다.

성소에서 휘장으로 비유되는 갈비뼈를 걷어 십자가에 세우는 것, 이것을 통해 안과 밖은 서로 소통된다.

따라서 오늘의 언어로 환원하면 타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육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자아 의식'이 갈비뼈인 셈이다.   

 

여기서 지성소는 하나님이며 남자며 존재다.

존재 자아다.

여기서 성소는 여자요 우리의 겉사람이다. 하여 갈비뼈를 여자를 향해 세운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상징한다.

예수는 제자들의 욕심과 욕망으로 형성된 세상 임금이고 제자들의 타자 자아다.

제자들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하는 타자 자아인셈이다.

예수를 자신과 동일시 함으로 정작 본래 자아는 그 뒤에 숨어버리고 은폐되고 만다.

이때 육체 예수는 제자들의 본래 자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은폐물이고 휘장인 셈이다.

예수는 바로 자신을 제물로 십자가에 매달므로 제자들 속에 형성된 휘장을 걷어낸다.

예수의 십자가는 거기서 제자들의 갈비뼈가 뽑히는 것을 방불한다.

제자들의 눈이 새로 열리게 하는 예수의 두 번째 안수가 되는 것이고 제자들의 속과 겉이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간다는 점이다.

온전한 소통을 위해서 갈비뼈가 남자에게서 뽑혀 여자를 향해 세워져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가 매개되어 있지만, 타자, 절대타자가 매개되어 있지만, 이는 모두 베드로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대하 드라마다.

모노드라마에 등장하는 수많은 배역인 셈이다.

에덴 이야기에서는 이를 신화적 이야기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하여 다양한 배역이 등장하는 것이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아담이 하와를 바라보며 여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하려 하나,

그것은 자신의 가슴에서 뽑혀 세워진 뼈를 바라보며 하는 노래다.

갈비뼈가 뽑힐 때, 살점이 뜯겨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이로다.

타자 자아로 형성된 자아가 뽑혀 나가는 뼈요 살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뽑혀 나가며 속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기운으로 다시 덧입혀지는 것이 결혼의 비밀이라 하겠다.

 

이는 마치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 55)는 표현을 방불한다.

신약에서는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증언하고 있으니 신부를 맞이한다는 말은

제자들을 새롭게 영접한다는 말이다.

역으로 제자들의 의식에 예수를 통해 형성된 세상 임금, 육체 예수를 소거하게 하고

예수의 정신인 기름 부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파루시아'를 경험케 하는 것이다.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향하여 세우는 에덴 이야기, 신약의 버전이다.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형성된 의식의 진화과정이다.

제자들과 예수의 이야기 속에서 전개되는 에덴 이야기의 베드로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여자를 위해 갈비뼈를 세우고 양식과 음료로 삼는 장면이다.

누구든 여자를 맞이하려면 여자를 위하여 살과 피를 준비하고 세워야(단을 쌓듯이) 한다.

정신의 진화는 도식화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헤겔이 말하듯 정반합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절대정신, 신적 의식의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한다.

 

처음의 정신은 타자 자아라는 형태의 에고를 중심으로 의식이 형성된다.

황무지(아다마)로 비유되는 에고는 마음의 갈등과 모순에 가득 차 있다.

처음 정신은 아다마가 정(正)이라 할 수 있겠다.

황무지가 진토가 되는 것은 처음 정신의 반(反)이다. 

여기서 정신에는 신적 의식이 싹튼다. 이때 신적 의식은 에덴 이야기에서 비로소 아담 아파르로 등장하고 남편으로 표현된다.

아담 아파르는 에덴동산에 머물게 된다.

기쁨의 동산 에덴의 동산지기인 아담에게는 과제가 있다. 아직도 황무지로 있었던 옛 자아 곧 겉사람과의 본질적 화해의 공간이 난아 있는 것이다.  

사실은 아다마도 나요, 아담 아파르도 나이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내 이야기는 에덴의 하아다마와의 화해를 향한 이야기기도 하다.

신적 의식 혹은 아담 아파르는 겨우 동산의 한 모퉁이에 불과하다.

기경(起耕)해야 할 하아다마(황무지)가 남아 있고 아담 아파르는 하아다마와 합일 과정이 남아 있다.

하아다마는 여기서 아담 아파르에 대하여 겉사람이고 아내가 된다.

그곳에서 비롯되었지만(민 하아다마), 그곳은 '아담 아파르'에게 남겨진 과제요, 동산지기가 갈고 씨 뿌려 경작해야 할 경작지다.

여기서 갈등과 모순은 찾아오게 되고 고통은 계속된다.

정신의 새로운 요구를 맞이하게 된다. 정신의 새로운 요구를 맞이하게 된다.

본래 정신은 숨어 있고 은폐되어 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야웨 하나님은 그에게 여자를 데리고 오신다.

이것이 둘이 하나 되게 하기 위한 결혼의 원리며 소통의 원리다.

그러나 번역하는 이들이나 신학자들이 흙을 사람을 만드는 재료로 오해하듯, 갈빗대 역시 여자를 만드는 재료가 아니다.

도리어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가로막힌 답을 허는 휘장이고 여자를 향해 세워야 할 제단이고 제물이다.

 

갈빗대는 세우는 것이 아니고 쌓는 것이다. 그것은 골방을 통하여 생성되고 취하게 된다.

그렇게 취한 갈빗대는 여자와 한 몸을 이루고 거기서 뼈를 이루고 살을 채운다.

생명의 세계는 그렇게 연쇄 고리의 계보를 이어간다.

 

이는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온전한 관계, 제대로의 소통의 길이 열리기 위해 십자가가 있어야 했던 것과 같다.

베드로와 예수가 언제 합일 되는가.

닭이 울 때 베드로의 속사람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속사람은 겉사람을 통해 나타나고 살아지고 꽃히우는 것이다.

우리는 내면의 아름다움과 꽃망울의 터짐을 영원한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는 곳, 저 앞에 놓아두고 있다.

그러고는 선악을 알게 하는 것에 몰두해 있다.

선악의 세계를 떠나 다시 고토로 향하자.

바벨론에서 돌아가야 할 곳은 다시 가나안이다.

 

우리의 혼인, 우리의 합일, 우리의 짝은 무엇이며 그를 이루는 것이 무엇일까.

짝은 겉사람과 속사람이다.

이 둘이 짝을 이루는 것이며 이 둘이 하나에 다다르는 것, 뫼비우스의 띠가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합일의 비밀이며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에 한 걸음 다가섬이다.

 

사랑은 겉에서 찾으려 해도 곤란하고 속ㅇ서만 있다고 해도 곤란하다.

사랑은 겉과 속에서 함께 하나가 되어 성취되어 간다.

사랑 안에서만 아들을 낳을 수 있다. 아들을 낳아야 살리는 자의 번열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가 되고 합일이 되기 전에는 겉사람의 속성, 정과 욕심의 속성으로 사람들에게 나아가려 한다.

자기 안에서 합일되지 않고 제 욕심만 취하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힌다.  살리는 자가 될 수 없다.

하늘의 형상을 입고 나가야 사람들에게서 제 욕심을 취하지 않는다.

 

예수는 자기를 부인했다. 제자들 관점에서 보면 유다나 베드로가 예수를 배신한 것이 아니다.

누가 배신이며 변절인가. 유다의 기대를 저버린 것은 누구인가.

베드로의 희망을 간단히 짓밟은 이가 누구인가. 그것은 곧 예수였다.

그렇다. 예수는 인간의 모든 희망을 짓밟는다. 인간의 희망을 짓밟고 새로운 인간의 길을 열어 놓는다.

이를 일컬어 하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늘은 인간의 희망을 꺾어버리고 나타난 허망이다. 예수의 배신은 구원의 희망을 꺾어버리고 나타난 허망이다.

예수의 배신은 구원의 길을 열고자 하는 배신이나 아무도 그를 이해하는 자가 없다.

신은 언제나 인간을 배신한다. 인간은 늘 희망고문을 하며 신을 찾곤 한다.

따라서 이제는 저 신을 향한 발거름을 멈춰서야 한다. 예수의 안내를 다시 받아야 한다.  

지성소에 머무는 신의 얼굴을 다시 만나야 한다. 허망에서 다시 피는 꽃 이야기가 왕국의 노래다.

 

에덴의 풍요, 기쁨의 정원 안에 누리는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것,

그러는 순간 거기에서 또 한 번의 큰 구렁이 있다는 것.

에덴의 이야기에 담겨 있다.

그리고 새롭고 산길(living way)을 통해 하늘과 땅은, 남편과 아내는 대동을 이룬다.

통합을 이룬다. 거기서 화해와 평화를 낳게 되는데 이를 아들이라 하고 한 몸을 이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