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생명 나무와 선악 나무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 김창호 지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 17)
성서의 에덴 이야기는 마음의 한 가운데 두 종류의 나무가 있다고 진단한다.
양심에는 선한 양심이 있고 화인 맞은 양심이 있다.
선악을 분별하는 기능을 하는 게 양심의 역할이고 좋음(토브)과 나쁨(라아)을 구분하는 게 양심이다.
좋음을 선이라 하고 나쁨을 악이라고 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
그런데도 끊임없이 인생은 좋음과 나쁨을 선과 악으로 환원하려 한다.
우리말 양심은 아름답고 진실한 마음을 일컫는 개념이.
신약 성서는 조금 다르다.
헬라인들은 '쉬네이데시스'라고 양심을 표현하는데, 함께 아는 것을 뜻한다.
라틴어로 문자 그대로 하면 '공동의 지식', 혹은 함께 보는 것(to see)을 의미한다.
더불어 사는 인생들이 공동으로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누구나 함께 알고 있는 것을 양심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모르면 양심이 작동하지 않는다.
모르고 행하는 것은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다. 함께 아는 것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 부끄러움이 작용한다.
헬라인들과 달리 히브리인들은 '양심'이라는 말을 특별히 구분하여 사용하지는 않는다.
구약성서에는 양심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동물의 장기 중 하나인 '콩팥'을 마음의 깊은 것에 비유해 문맥에 따라 이를 '양심'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심이라는 구별된 말은 없다.
콩팥은 몸속의 피를 걸러서 깨끗케 해주는 기능을 한다.
양심은 사회의 혼탁한 기운을 걸러주는 역할을 하는 점에 있어서 그 비유가 경이롭다.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듯, 우리 마음에도 반짝이는 것이 있는데
양심이라는 지렛대라고 철학자 칸트는 규정한다.
그는 것을 통해 도덕률의 규칙과 신의 존재를 규명하려 한다.
양심은 선악의 규칙을 생산해내는 준거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를 구성해가는데 양심이라는 요소가 작동한다.
여기까지는 도덕률에 따른 양심의 세계와 선악 나무의 보편성이다.
동산 중앙에 존재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씨앗 혹은 뿌리가 곧 '양심'이다.
양심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억제하고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지만
인간을 근원적으로 새롭게 하지 못한다. 도리어 절망으로 인도한 후, 그 다음 세계을 열어준다.
이게 양심의 더 큰 역할이다.
인간은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는 삶의 규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도덕 규칙을 세우고
그 규칙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당위의 법칙이 양심이고 도덕률이다.
도덕률이란 사람이 사는 길과 덕스러움의 규율이다.
이게 처음 사람이 선악의 길에서 살아가는 존재 방식이다.
칸느의 말대로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보편타당하게 행동하라"는 뜻은 네 의지가 무엇을 행하려 할 때
누구나 공감하고 보편 타당하게 행동하라는 의미다. 도덕의 규칙을 말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젖을 먹이고 양육하여 아이가 정상적으로 발육하게 하며 키와 몸이 자라게 한다.
아버지는 사회 구성원으로 도태되지 않도록 정신의 규칙과 방식을 태어난 자녀에게 가르친다.
엄격한 역할 분담이 아닐지라도 대개 부와 모의 역할이 그와 같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의 양식이 은연중 아이에게 전해지고 양심에 작용한다.
그 사회의 관습과 도덕이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전해지고 양심은 그에 반응한다.
양심의 규칙은 내게서 생성되기보다는 사회에서 그 규칙을 부여한다.
전통이 전해주고 공동체의 관습이 전해준다.
따라서 양심은 내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 기준과 개인의 기준, 욕망이 다르기에 늘 충돌한다.
양심은 사회적 관습에 반응하기도 하지만, 내면의 직관에 의해 형성되기도 한다.
사회적 통념과 개인의 직관지가 충돌하게 되고 양심이 갈등하게 되는 까닭이라 하겠다.
직관을 통해 분명하고도 자명한 이치에 양심이 반응하는 경우 이를 선한 양심이라 한다.
그러므로 양심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규칙을 생성해 내는 매우 중요한 지렛대 역살을 하지만,
하여 인간을 순화시키고 젠틀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근원적으로 인간을 새롭게 하지는 못한다.
양심 넘어, 선악의 저편에 더 큰 진실과 삶의 존재 양태가 있다.
선악의 줄타기에 양심이 기능한다면, 생명은 선악을 넘어서는 존재 양태다.
양심은 도덕률을 생성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삶을 선도하려 하지만 궁극적으로 심판의 기능을 하게 한다.
심판은 생명을 살리는 게 아니라 사망으로 안내한다.
따라서 양심은 처음 사람 곧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 세계의 도덕적 규칙을 생성하지만 결국 사망을 낳게 할 뿐이다.
동물의 형상이란 그 정신과 마음이 약육강식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는 존재 상태라 하겠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처음 사람에서 두 번째 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마음의 별은 양심에도 반짝이지만, 생명 나무를 이루는데도 반짝인다.
성서에 등장하는 '루아흐'의 깨달음에 의해 잠시 선악으로 경도되기도 하지만,
결국 생명의 호흡을 안내하는 하늘의 별이다.
매우 좁은 문이다.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어야 한다는 건 비도덕과 비양심의 세계가 아니라 도덕과 양심을 포월하여 존재하는 세계다.
도덕으로 가늠하거나 재단되는 세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양심의 너머에 있는 생명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이 영성 순례의 길이다.
동산 중앙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나무가 있다.
우리의 여행은 끊임없이 생명의 원리에 귀의하는 것이고
좁지만 열면 닫을 자가 없는 열린 문을 향하는 여로(旅路)라 하겠다.
정원 한가운데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다는 뜻은, 한 결음 더 깊이 들어가면
단지 양심에 반응하는, 타인이 전해준 지식에 준거한 옳고 그름을 넘어선다.
그것은 엄격히 하아다마(황무지)에 해당되는 규칙일 뿐이다.
선악에 대한 보편적 규칙이기는 하나, 에덴 이야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는,
양심에 따른 공동의 앎을 넘어선다.
양심에 반응하는 공동의 앎은 자기만의 깨달음 곧 영적 지식이고,
출애굽 후 가나안에 도착한 히브리인들, 그들의 이야기로 하면 북방 바벨론에 사로잡혀가는 이야기를 함의 한다.
(이 책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편 참조)
모든 종교는 소위 선각자 혹은 종주(宗主)의 깨달음을 기준으로 선악의 도그마를 형성한다.
개인의 영적 순례 여정에도 동일한 구조에 노출된다.
깊은 깨달음을 갖게 되면 자기 깨달음을 스스로 절대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깨달음의 지식을 준거로 그외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악으로 규정한다.
영지주의자들이 빠졌던 오류다. 그것이 뱀의 유혹이다.
여자를 통한 유혹이다.
배타의 씨를 잉태한다.
도대체 깨달음이라는 괴물을 중심으로, 분별과 나눔과 배제를 반복한다.
깨달음이 찾아오면 신비하다. 자기만이 선택받은 존재로 오해한다.
두로 왕이 되어 북극성에 올라가 빛나는 빛의 자리에 앉으려 한다.
솔로몬의 부와 귀를 누리려 한다.
지식과 지혜로 남방 여인의 수레에 담긴 금은 보화를 탐한다.
세금을 징수하여 자신을 보호할 방패를 만든다.
666은 먼 미래에 있을 이야기가 아니다.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 나무에 소위 666의 기원이 깃들어 있다.
반드시 그 유혹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 부끄러움을 알게 한다.
정원 한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운 줄 모르던 인생으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별처럼 아름다운 깨달음이 도리어 인생의 덫이고 무덤인 줄 알게 하는 나무다.
마침내 생명 나무로 귀의하도록 안내하는 이정표라는 말이다.
지식의 껍질을 깨고 나면 거기 마음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샘물이 솟아난다.
에덴의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다.
에덴의 생명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로 인해 잠시 숨어 버린다.
에덴의 이야기에서 생명 나무는 아벨과 셋을 통해 다시 등장하고 꽃핀다.
에덴의 생명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헛됨이 드러나고 텅빔의 아벨이 태어나면서 조금씩 성취된다.
동산 중앙에 배치된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는 인생의 두 실존과 두 계보와 두 세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인생은 나무로 비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