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12. 아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2022. 6. 14. 23:35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김창호 지음

 

 

 

아담은 사람의 원형이다.

고유명사의 아담, 그 아담은 동시에 모든 인류의 원형적인 표상이며, 따라서 '나'에 대한 본질을 그린 그림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2~3장에 등장하는 아담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사건들을 '그 아담', 곧 에덴의 특정한 아담에 한정해 놓고

읽는다면 수많은 오해를 야기한다.

도리어 그것은 나의 일기책, 나의 영적 여정에 대한 MRI, 자가공명 영상 촬영필름이다.

수많은 내면의 순례도를 짧은 이야기 구조, 신화적 구조의 형식을 빌려 그린 그림이다.

 

바울 서신은 바울의 이야기이자 그의 고백이 담긴 책이지만 거기에는 보편성이 있다.

창세기의 아담 이야기 역시

비록 그 이야기 구조가 신화적인 이야기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나,

죄의 기원이나 인류의 기원에 대한 기록이 아닌

인간에 대한 원형적 통찰이 담긴 기록이다.

거기서 인류의 '죄의 기원'을 읽으려 할 때, 변질된 신학 이론이 창출되고

수많은 사변적인 논리가 생성된다.

아담 이야기는 특정 아담을 통해 인간의 보편을 말한다.

그런데 특정 아담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모든 아담들에게 죄가 있게 되었다는 식의 성경 읽기가

수천 년 동안 되풀이되고 있다.

그것은 창세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체 성경에 대한 읽기 방식이 그랬고

그 같은 인간관 아래에서 형성된 서구 문명의 역사가 왜곡의 역사요,

그러한 인간관에 의해 면면히 흘러온 종교 이데올로가가 인간을 굴곡지게 했다.

인간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종교이데올로기로 족쇄를 채웠다.

 

아담은 인간에 대한 아르케 타입이다.

인간의 원형적 이야기다. 모든 인간의 전형이 그대로 담겨 있는 모습이다.

그 사진은 평면적으로, 일차원적으로 특정 시간을 단순 촬영한 사진이 아니라, 통시적으로 촬영된 모습이다.

따라서 아담의 아야기는 나의 과거 모습이 담겨 있기도 하고 현재의 모습이 있으며 또한 미래의 모습이 있기도 하다.

미래의 모습에 대하여 필름을 제대로 해독해 낼 수 있는 독법 기술이 없다.

단순한 평면적 사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읽어내고 거기서 나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통시적인 눈과 그 전체를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미래의 모습을 미리 전망해 볼 수 있는 눈이 열려 있어야

아담의 이야기를 통시적이고 공시적으로 볼 수 있으며 거기서 나의 실존을 볼 수 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을

인류에게 죄가 들어오게 된 근본 원인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어찌 그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어서 죄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할까.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도 죄인이라는 식의 굳건한 종교적 교리가 형성되게 된 데에는

물론 바울이 크게 일조를 하였다.

바울의 의도는 그 같은 교리를 형성하고자 함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학에 원죄론의 교리가 형성될 수 있게 이바지한 것은 분명하다.

 

그때에 그들이 신 포도를 먹었음으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렘 31:29- 30)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 2- 4)

 

선지자들은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어서 내 이빨이 시다는 속담이 옳지 않음을 철저히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어는 사이 그같은 속담이 슬그머니 원죄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들어와 있다.

이 같은 전통은 인간의 내면의 뿌리 깊은 전가(轉嫁) 심리 때문이다.

우리 말에도 잘되면 내 탓이요 못되면 조상 탓이란 말이 있듯, 죄를 조상 탓으로 돌려놓고 잠시 숨으려는 의도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것을 교리로 만들어 놓고 인생을 우롱하는 처사야말로 기가 막힌 일이다.

의(義)도 역시 예수라는 조상 탓으로 간단히 해결처리 하려는

이 웃지 못할 하이코미디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지독한 칭죄(稱罪), 칭의(稱義) 교리다.

 

처음 아담이 이렇게 왜곡되어 있으니 마지막 아담에 대해 같은 왜곡이 있을 것, 두말하면 잔소리다.

오늘날 형성되어 있는 속죄교리 혹은 구원론은

속죄 제물인 대제사장 예수에 대해 너무도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는 탓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예수는 단순히 이천 년 전 그렇게 지고 가는 단회적 사건이 아니다.

그 예수는 죄가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대한 계시적 사건이다.

오늘 우리에게 어린양으로 나타난 예수는 이천 년 전과 동일하게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처단해야 하다.

그러므로 예수는 대속(代續- 代대신할 대, 續잇다을 속) 제물이 아니라 속죄 제물인 것이다.

죄를 대신 속하는 제물이 아니라 죄를 속하는 제물인 것이다.

 

베드로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세상 임금으로 등장했던 예수와 같이

오늘의 예수 역시 우리의 종교적 우상이 되어버렸다.

거기 그렇게 우리의 섬김의 대상으로 있는 예수는 우리들의 죄악이며 우리들의 욕심이다.

이 예수는 지독한 이기심과 욕심의 집합이며, 우리들의 이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축복의 신으로 둔갑해 있다.

그러나 베드로의 눈을 뜨게 하려면 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우리들의 지독한 욕심으로 점철된 오늘의

예수 역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죄로부터, 우리 욕심의 상징인 예수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 그는 우리 안에서 생명의 부활로 다시 나타난다.

숭배의 대상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가슴과 정신으로 내가 다시 태어난다.

그래야 우리가 죄로부터, 우리 욕심의 상징인 예수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 그는 우리 안에서 생명의 부활로 다시 나타난다.

숭배의 대상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가슴과 정신으로 내가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곧 예수의 죽음인 동시에 나의 죽음이다.

당신의 그 예수가 죽어야 비로소 예수의 정신이 당신의 가슴에서 다시 살아난다.

이를 일컬어 바울은 예수와 함께 못 박히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산다는 세례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이 간과되고 단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단순 교리에 매몰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죄가 눈과 같이 희게 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상으로 등장한 지 이천 년 전의 특정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인류의 죄를 속하고 있다는 도그마. 그것은 개체적인 특정 예수가 짊어진 것이 아니다.

그 예수는 모든 이들이 열망하고 추구하는 예수다.

바로 그 예수는 오늘 당장 그대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그대가 함께 죽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과 함께 죽어야 할 예수는 금지옥엽처럼 모셔놓고 세상 임금으로 자신들의 관념에 모셔놓은 채,

이천 년 전 예수에게만 모든 것을 전가한다.

이는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 예수는 그대의 죄를 짊어지고 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그대의 예수란 그대의 모든 꿈과 소망을 담아 그대가 따르고 있는 그 예수가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가 오늘 이 시점에서 그대와 나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천 년 전의 예수는 하나님이 죄를 처리하는 것에 대한 표상이다.

 

마찬가지로 아담은 죄를 처리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표상이다.

두 번째 아담이 우리들의 무명을 도발하는 표상이라면,

처음 아담은 결코 우리의 어둠을 벗겨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러므로 처음 아담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게 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처음 아담은 그가 누가 되었든지 선악의 열매를 먹고 살 수밖에 없다.

창세기가 보여주는 그림은 그사실을 알려주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사람으로 다시 낳음을 입으라는 말이다.

하늘의 형상으로 덧입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선악의 이야기는 곧 나를 말해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로소 사람'인 처음 사람도 선악의 세계를 거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에덴 이야기는 이같은 장쾌한 순례의 여행을 담아내고 있는 뮈토스요 동시에 로고스다.

 

아담이 지금의 나를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곧 내가 창세기 2-3장의 모습과 동일하게 현재를 살고 있다는 의미다.

에덴동산의 사람 이야기에 대해 주이 깊게 볼 대목이 있다.

단순히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일컬어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담이란 하나님의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은 존재다.

산 혼이 된 존재를 일컬어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모양은 하고 있으나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즉 사람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동물적 본성만 있을 뿐 하늘의 정신과 얼로 호흡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직립보행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생각하는 기능이 있다 할지라도

그 형상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라 동물의 형상이다.

창세기 2- 3장은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서 산 혼이 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자 짐승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이다.

아담의 이야기는 인생의 정신에 대한 이야기, 내면에 대한 이야기다.

그 겉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내면이 어떻게 그의 겉사람과 함께 하나가 되어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마침내 한 번 그 겉사람에게 속사람이 잡아먹히고, 다시 그것을 극복하는 극복의 원리가 거기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