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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날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별과 별 이야기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2022. 6. 10. 14:11

      '형상과 글' 카페

            창세기 1장 연구 편

            김창호님 글

 

시 104: 29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으신지요.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합니다.

창세기 1장 9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우리는 셋째 날 이야기를 지나

하나님의  창조의 넷째 날 이야기에 당도했다.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는 것, 그것이 셋째날 이야기 아니던가.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일곱 날을 기반으로 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 인간을 빚어 가는 일곱 날 이야기이다.  

마치 태중에 아이를 임신하고 나

면 아홉 달 동안 그 안에서 사람의 형체를 하루 하루 생성해가듯,

우리의 육체가 태어나면 때를 따라 그에 맞게 성장하듯, 우리의 육체가 영아기, 유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가 있듯, 우리 인식의 발달 단계를 여러 형태로 나누어 말할 수 있듯, 하나님의 세계,

그 인간의 내면과 하나님의 정신을 배태하고 키워가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도 나누어 말해보면

곧 일곱 날 창조가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주의 창조이며 그 변화 무쌍한 인간의 창조이며 그것은 곧 나의 창조 이야기다. 

인간 속사람에 대해 우주창조 설화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나가고 있는 선문답을 우리는 앞에 펼쳐놓고 있다. 

 

넷째 날은 하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셋째 날이 뭍과 바다 이야기였다면, 땅의 이야기였다면, 넷째 날은 하늘 이야기 아닌가.

땅의 무수한 일들은 동시에 하늘을 따라서 진행된다.

하늘과 땅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 안에 서로 마주보고 있으나 또한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물이 무엇인가. 우리가 지난 호에서 살펴보고 되풀이 말하고 있지만, 물은 두 종류 곧 윗물과 아랫물이 있었고

아랫물은 우리의 고뇌와 원초적 본능이며 원초적 욕망이기도 하다.

앎에 대한 욕구는 그 어떤 욕구보다도 앞선 욕구이다.

앞을 추구한다함은 체계화된 지식의 세계만을 탐닉하는 지적 호색한을 일러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인간의 정신은 앎을 자양분으로 자기 자리와 생명을 유지한다.

학교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도 하다못해 연애인들의 가십 정보라도 정신의 주머니에 집어넣고 있어야

그 자신을 지탱하는 것 아닌가.

창조설화의 넷째 날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별과 별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셋째 날 등장하는 물과 뭍은 이 땅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터인데

지구는 별이 아니란 말인가.  

넷째 날 존재하고 있는 자구라는 별과는 다른 별개의 별을 만들고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넷째날 이야기 역시 자연현상을 빌어 인생의 내면 창조 이야기를 풀어가는 선(禪)적인

언어 임에 틀림없다.

해와 달과 별은 천체의 운행원리에 따라 사시와 연한과 징조를 생성한다.

해와 달과 별은 천체의 운행원리에 따라 사시와 연한과 징조를 생성한다.

우주의 천변만화를 일으키는 근거요 원인이며 유기적인 동력인 셈이다.

 

셋째 날 땅을 덮고 있는 물은 이성이요 인식 능력이 확보한 각종 지식들을 비유한다.

이성에 의해 분석된 잡다한 지식의 모든 세계가 땅을 덮고 있는 물이다.

눈 코 입 귀를 통해 들어오는 각종 정보들을 분석하고 살펴보는 것이 오감과 더불어 이성적 인식이 행하고 있는데

인식의 배면에 숨어 있는 것은 모든 인생들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에고' 그것이 아닌가.

그것이 물이다.

사상이라는 것, 철학이라는 것들은 우리들의 인식능력이 만들어낸다.

날카로운 지성의 칼이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여 요리하고 휘둘러 댄다. 그 이면에 숨어서 이성을 조정하고

지배하는 지배자가 곧 어두움이며 그를 일러 성경은 죄라 한다.

성경에 대해서도, 신에 대해서도 인간에 대해서도 이성적 능력이 먼저 분석활동에 들어가지 않는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힘의 원천이 거기에 있다. 에너지원도 거기에 있다.

이것이 한 곳으로 모이라는 것, 바다로 모이라는 것, 땅을 뒤덮지 말고 한 곳으로 모이라는 것이

셋째 날 이야기다. 마음의 땅을 드러내라는 말이다.

덮여 있는 마음의 세계를 열어제끼는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욕심을 따라 이성이 아름답다고 분석하고 나면 마음이 뒤따라가서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이 어둠, 물에 덮여 있는 인생의 실존이다.

물론 거기서 마음이라고 일컫는 그것이 도대체 어찌 그대의 마음이겠는가.

마음이 허망한 것에 굴복하고 있을 따름 아닌가.

단지 잠시 마음이라고 사람들은 오해하고 그렇게 이름을 붙쳐 놓고 그렇게 부르고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서구사상의 모든 형태이다.

뭍이 드러날 때는,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두꺼운 가죽, 양피를 베어내는 할례,

관념과 선입관과 편견을 베어내는 것, 그것이 창세기 1장의 언어로는 물이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 마음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뭍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드러난 뭍에 비로소 각종 채소와 과목들이 맺히는 것 아닌가.

셋째 날 물과 뭍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나면, 마음에 피어나는 각종 과목과 채소, 맺히는 열매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람과 세계의 관계를 형성하는 모든 활동이 비로소 성소(마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성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그곳이 곧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하늘 이야기다.

넷째 날 창조가 진행되는 곳 말이다.

이성은 자기를 중심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관념을 형성한다.

관념이 지배하던 것이 바다로 모이면 사람을 볼 때 외모로 보지 않는다.

이미 형성된 의식이 선입관으로 작용해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사람을 대하게 된다.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대하거나 사람을 대하게 되면 그 외모를 보지 않는다.

마음의 빛으로 사람을 볼 때에는 그 마음을 볼 따름이지 그의 외모를 따르지 않는다.

마음으로 사람을 읽고 마음으로 사물을 대한다.

이때 이성은 마음의 눈을 투과시켜 반사하며 그 인식능력은 마음의 세계를 담아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소나무를 대할 때 그 용도를 따라 대하지 않는다.

거기에 있는 소나무와 나와의 관계는 우주 안에 있는 하나로 바라본다.

땔감으로 보거나 석가래의 용도를 생각하며 소나무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누군가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저놈은 땔감으로 적합하다고 한다면 소나무에게 얼마나 폭력적인가.

사람들은 소나무를 소나무로 볼 능력이 없다.

산을 산으로 보고 강을 강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거기 눈꺼풀에 욕심의 비늘이 달라부터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늘은 속 사람이다.

하늘과 땅은 심천(心天)과 심지(心地)를 일컫는 말이다.

마음에는 하늘이 있고 땅이 있다.  천체가 거기 모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일컬어 소우주라고 혹자는 말한다. 소우주가 아니라 대우주이다.

대우주 속에 소우주가 있는 것인가. 도리어 소우주 속에 대우주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뭍으로 표현되면 심지요, 하늘로 표현되면 심천이다.

신천에는 마음의 세계를 비추는 빛이 있다.

이전에는 암흑이 있었다. 아니 흑암을 빛으로 삼고 있었다.

그것을 무명이라 하고 죄라 한다.

두꺼운 물가죽이 가로 막혀 있기 때문에 빛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었다.

물이 가로막고 빛에 대해 요리하고 분석했다.

이것이 걷히고 나면 빛이 안에서 흘러나온다.

 

마음의 자리에서 광명으로 비추는 빛이 태양이며, 달은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한다.

그러고 보면 달은 곧 이성이요, 마음에 떠올라 영원히 타오르는 빛이 태양이다.

이것을 반사해 내는 것이 우리들의 이성이다. 달은 어두움을 주관하는 빛이다.

따라서 세상을 주관하는 빛이 이성이다.  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힘이 이성의 능력이다.

생각하는 능력이 세상을 주관해 가는 원리요 힘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자기 규정을 한다.

호모사피엔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지극히 왜곡하는 표현이다.

이성은 인간의 특별한 특성임에도 그것은 본체가 아닌 지체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인간 전체를 담아내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물론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인간을 규정하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규정해놓고 보니 어쩌면 매사에 이성이 앞서 행하고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성적 판단만이 오로지 옳다고 주장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부분이 전체로 환원되고 있다. 진정한 빛은 마음의 세계에 있다.

꺼지지 않는 빛에 의해 이성은 단지 그 빛을 받아서 자신의 기능을 발휘해야 하는데 도리어 이성의 판단이 앞서 행하고 있으니 앞뒤가 바뀐 것이다.

그것이 뭍 아래에 갔을 땐 상관이 없는데 물이 위로 덮여 있을 땐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이성적 대화를 하는 것, 그것의 토대와 근본은 마음이어야 한다.

이성적 활동을 동원시켜 행하는 모든 활동은 빛을 반사시켜 말하고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이 모든 것을 행하고 있다.

이성이 깨닫는 깨달음에 사람들은 목맨다.

그 깨달음에 사람들은 감탄하고 영향을 받는다.

별은 무엇일까. 캄캄한 밤하늘을 비추는 별, 나그네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별,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사람들에게 별은

항해의 방향을 알려준다.

캄캄한 밤하늘의 별은 길을 잃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혜의 상징이요, 길을 인도하는 인도자의 지혜이다.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달과 별,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스스로 돌면서 공전과 자전을 계속한다.

스스로을 돌리면서 밤과 낮을 반복한다. 빛을 등지고 있을 때는 밤이고 태양을 마주보고 있을 때는 낮이다.

마냥 태양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등지고는 바라보고 등지고는 바라보며 삶의 순환을 계속한다.

달은 빛을 받아서 반사하여 태양을 등지고 있는 동안 지구에 빛을 보낸다.

이것이 어둠의 빛이다. 동시에 지구와 가까웠다가 멀어졌다하면서 끊임없이 밀물과 썰물현상을 일으킨다.

달은 바다를 역동시킨다.

바다의 온갖 생물들은 밀물과 썰물을 타고 흐르는 물 속에서 생육하고 번성한다.

한 달을 주기로 달의 변화가 반복되는 동안 지구의 현란한 생명현상은 지속된다.

태양과 달과 별은 사시와 연한과 징조를 일으키며 생명의 천변만화를 일으키고 있다.

생명의 신비한 오케스트라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심천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마음의 좌소에 꺼지지 않는 불로 자리하고 있는 태양은 무엇일까.

단지 마음이라고 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마음의 하늘에 좌정하고 있는 하나님은 곧 사랑이다.

사랑의 불꽃을 중심으로 달과 별, 지구는 존재한다.

사랑은 만물의 근거요, 존재의 터전이며 궁극이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다.

단지 사랑의 빛을 온전히 받지 못하고

도리어 어두움을 사랑으로 환원해 놓고 어둠을 중심으로 자전과 공전을 하는 것이 인생이다.

비록 그것이 거짓된 사랑이라 하더라도 인생은 사랑을 중심으로 삶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따라서 어쨌든 꺼지지 않는 불로 삶의 중심축으로, 하늘에 타오르는 빛으로 있는 것은 따라서 사랑이다.

그것이 어떤 종류이건, 사람이 무엇을 사랑으로 여기든지

인생은 사랑을 중심으로 자전과 공전을 하며 그의 인생이 움직인다.

따라서 넷째 날 하늘에 태양을 만드는 것은 이제껏 스스로가 사랑이라고 여겼던 어둠의 원리가 지나가고

하나님의 창조의 하늘에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기 마음의 좌소에 하나님의 빛으로 영원히 활활

타오르는 빛으로 계신 하나님, 곧 사랑이 태양이다. 태양은 그 자체의 에너지로 움직인다.

무엇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자체의 동력에 의해 스스로를 불태우며 땅에 빛을 비추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마 17: 2)

우리들의 이성은 곧 법칙이며 분별이며 나눔이며 분리이다. 인식의 능력이다.

옛 사람에게도 같은 원리는 적용된다.

비록 그것이 어찌되었든 옛사람이 속해 있는 세계에서 조차 같은 식양을 따라 인생의 삶은 펼쳐지고 전개된다.

즉 욕심의 원리를 따라 사랑이 형성되고 인생은 그것을 근간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말이다.

거기 성전을 짓밟고 있는 우상은 욕심의 원리에 의해 규정된 사랑이다.

욕심이 모름지기 동력이고 태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으로 여겼다.

이성이 곧 욕심이 빚어 만든 사랑을 중심으로 움직이며 거기에서 발산하는 빛을 반사하여

분별하고 나누고 인식의 활동을 왕성하게 해 왔다. 

거기서 규칙을 생성하고 율법을 만들어 내며 그것을 근간으로 세상은 유지되고 있다.

그러므로 인생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묻고 사는 게 인생이다.

 

처음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원리도 동일한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따라서 움직이지만

모두가 인생이 스스로의 욕심을 좇아 행하는 행함이다.

도대체 인생은 사랑을 알 수 없다.

사랑이라는 신기루만 존재하는가.

사랑이라고 목매며 그 주위를 맴돌다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자각 속에서 절망하며 삶을 배우다가

새로운 빛에 이끌리기도 하고 거기 그냥 묻혀 살기도 한다.

따라서 어찌되었든 이성의 빛은 하늘에 떠오른 달빛인 셈이다.

그것은 율법이요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요 믿음이라 일컬을 수 있다.

물론 처음 하늘에서의 믿음은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인식활동이 만들어낸 허망한 믿음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곧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마 24: 29)

날이 도래하는 것, 그리고 새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별들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날이 도래하는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창조의 넷째 날에 창조하시는 달은 무엇일까.

그렇다. 하나님의 창조의 넷째 날의 달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성은 하나님의 좌소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좌정하고 계신 생명의 빛을 받아 그것을 인식의 영역으로 반사시키는 역할을 한다.

피조물들의 고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지 않던가.

비로소 인식의 능력은 제대로 빛을 반사하여 사랑의 본체에 대한 소망을 잉태하고

밤하늘의 은하수와 함께 여행자의 길을 열어준다.

비로소 하나님의 성소에 벨리알이 쫒겨나고 온전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좌정하고 계시니

그 빛을 반사하여 나타내는 말씀과 로고스가 또한 달빛이 아니겠는가.

물론 새계명으로 주어지는 말씀이 달인 셈이다.

인식의 활동을 통해서 주어지고 나타나는 것이 달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두 광명은 사랑과 믿음이다.

인생을 이끌어 가는 두 개의 큰 빛이다.

그것이 사랑이요, 믿음이며 그 믿음은 로고스를 통해서 형성되고 주어진다.

인식의 빛을 통해서 믿음이 자리잡는다.

별이란 무엇일까. 믿음은 곧 별을 통해서 시작된다. 믿음은 밤하늘의 별이다.

밤 하늘의 은하수는 나그네의 길잡이다. 북두의 일곱별은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에게는 나침판과 같다.

별은 깨달음이며 직관을 통해 시시각각 주어지는 각성이다.

별은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는 직관을 통한 앎이다.

베드로는 샛별이 마음에 떠오르기까지는 경의 모든 예언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환기시킨다. (벧전 1: 21) 

샛별이 창조되는 곳은 마음이라고 한다. 거기가 곧 하늘이다. 샛별은 곧 믿음이다.

마음에 주어지는 믿음의 열매가 샛별이다.

샛별을 통해 로고스는 분명해지고 확고해진다.

별은 믿음이기도 하고 소망이기도 하다. 별을 보며 꿈을 꾼다.

흑암 중에도 빛이 일어난다고 한다.

칠흑같은 암흑이라 하더라도 빛이 일어나는 것을 아는 자들에게는

흑암에 일어나는 빛에 의해 새로운 날을 맞이할 것이다. 믿음 속에서 소망을 갖는다.

수많은 각성을 통해 믿음이 형성되고 믿음을 따라서 소망은 커진다.

믿음과 소망은 사랑을 지향한다. 사랑은 소망 가운데 믿음을 잉태한다.

 

유치원 아이에게 유치원 선생님은 별이다. 믿음이며 꿈이며 소망이다.

그같은 믿음은 어린아이의 내적성장의 동력이 되어 아이를 성숙케 한다.

누구나 그 같은 꿈 가운데 믿음을 잉태하며 그의 사랑을 펼친다.

전자는 어린아이의 구원을 향한 열망이며 후자는 성숙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내리 사랑의 모습이다.

전자의 삶이 아름답다면 후자의 삶은 더더욱 아름답다. 전자가 상구보리라며 후자는 자리이타이다.

하나님은 전자를 통해 지성소로 안내하고 후자를 통해 지성소의 빛을 흘려보낸다.

생명은 하나로 고착된 정형이 아니다. 고형물이 아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유기적 역동성이다.

그 같은 우주쇼의 펼쳐짐이 동일하게 나의 내면에서도 진행된다.

해와 달과 별들의 관계 속에서 사시와 연한과 징조가 나타난다.

사시와 연한과 징조는 수많은 생명의 변화무쌍한 오케스트라를 연출해내는 연출가이다.

거기 인생의 지혜가 있다.

사랑을 중심으로 성장해 가는 수많은 생명들의 낳고 자람이 있다.

사시와 연한과 징조 속에서 인생은 성장 발육한다.

징조를 분별하고 따를 따라 각양 각색의 모양이 펼쳐진다.

이제 때를 분별하고 사시와 연한과 징조를 따라 연출되는 우주의 변화를 온 몸으로 살아내는 혜안과

지혜가 우리 몫으로 남겨져 있다.

우리에게 한 날에 머물지 않고 새날을 맞이하게 하며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키워가고 창조의 손길이 멈추지 않으니 이 어찌 감사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빚으시는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앞서 행하던 것이 뒤로 물러나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아서 매일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삶을 살아가는 복있는 자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