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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2022. 5. 19. 18:52

ㅌ'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김창호 지음.

 

 

9. 천지와 지천

   하아레츠(the earth), 하샤데(the field), 하아다마(the ground), 아담(the Adam)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창 2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4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the earth)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the fild)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the field)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5절)

 

창세기 2장 4절 문장의 후반부,

'바욤 하쇼트 예호바 엘로힘 아레츠 베샤마임'의 문장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아레츠가 샤마임보다 먼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역성경은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다고 그 어순을 천지(天地)로 하고 있다.

공동번역과 개역개정본은 히브리어 원문을 따라서 천지를 지천(地天)으로 수정해서 번역하고 있다.

대개는 하늘이 먼저 나오고 이어서 땅이 나오는데, 땅이 먼저 등장하고 이어서 하늘이 나오는 것을 가볍게 지나갈 수 없다는 얘기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창 2: 4 개역개정)

 

창세기 1장 1절은 하샤마임( 그 하늘들) 베하아레츠( 그 땅)고

창세기 2장 4절의 앞 문장에서도 하샤마임 베하아레츠(그 하늘과 그 땅)로 이것이 일반적인 배열 순서다.

그런데 2장 4절의 뒷 문장의 경우, 주어가 야웨 엘로힘이고 동사는 '아사'며

아사의 대상인 목적어가 아레츠와 샤마임인데, 여기 아레츠와 샤마임에는 정관사(하, 베하)가 등장하지 않는다.

동시에 아레츠(땅)가 먼저 등장한다. 천지가 아니라 지천(地天)인 셈이다.

 

전술한 대로 이후 전개될 이야기는 톨도트(계보)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갑자기 천지가 여기서는 왜 지천일까?

한글 개역성경은 천지로 번역하지만 개역개정판과 공동번역은 '땅과 하늘'로 개정했다.

아울러 '아사'를 반영해서 '만드시던'으로 개정하고 있다.

대부분 번역성서들은 땅과 하늘의 어순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특이하게도 한글 개역성경과 마찬가지로 70인역은 하늘과 땅으로 번역한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천지의 낳고 낳음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에덴 이야기를 전개할 때 하늘 이야기는 보이지 않고 땅의 이야기가 지속해서 언급되고 있다.

왜 그런가.

 

에덴의 이야기는 하늘과 땅의 '낳고 낳고'에 대한 계보 이야기다.

천지의 계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개역개정본은 톨도트를 '내력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천지의 '낳고 낳고'의 족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내력'이라 번역한다.

하늘이 하늘을 낳고 땅이 또 땅을 낳는다는 말은 메타포로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성립 가능한 문장이 아니다.

하늘이 하늘을 낳는다거나 땅이 또 땅을 낳는다는 말을 이해하기란 상식적으로 어렵다.

해서 일까? 번역자는 도저히 족보라거나 계보라고 번역해내지 못한다. 고심 끝에 찾아낸 답이 '내력'이리라.

현대인의 성경은 '대충'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최악의 번역이다.

 

한국의 전래 동화에서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천지의 족보'라는 말은 은유를 동원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간과하면 에덴 이야기는 신화 속에 갇혀버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로고스는 발견할 수 없게 된다.

 

톨도트는 게네세오스요, 게네세오스의 대표적인 사례가 마태복음 1장 1절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예수 크리스투 휘우 다윗, 휘우 아브라함이다.

이후 열네 대, 열네 대, 열네 대의 계보가 나열된다.

에덴의 계보 이야기와 마태복음의 계보 이야기는 병행구요,

각각의 버전으로 계보에 대해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는 말이다.   

성서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족보 이야기다.

단지 혈육의 족보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의 변화를 나타내는 족보라는 점이다.

 

에덴의 계보는 땅의 '낳고 낳음' 이야기로 진행된다.

하늘의 낳고 낳음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왜일까?

동사 아사의 목적어로는 천지가 아니라 지천으로 어순을 바꿔 기록하고 있다.

땅이 먼저 나온다. 땅의 낳고 낳음이 하늘의 낳고 낳음인가? 이 점을 유심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어서 나오는 창세기 2장 5절은 아레츠, 땅의 "낳고 낳음"이야기가 전개된다.

땅이 땅을 낳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에덴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서 의문을 풀어보자.

샤마임(하늘)이 상징하는 바, 아레츠(땅)가 은유하는 바

그 메타포를 간과한채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면,

즉 이야기를 이야기로 듣지 않고 역사적인 팩트로 인식하고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답이 없다.  

거기서 성경은 발언을 멈추고 만다. 들려주려는 바가 들려지지 않는다.

위대한 창조주의 이력과 연혁만 읽게 되고 만다.

신의 위대함을 노래해야 하는 박수부대로 강요당한다.

그 같은 주장을 토대로 터무니없는 도그마를 생성하고 종교의 성을 구축해 인생을 질곡으로 끌고 가는 일은

대명천지 멈춰야 한다.

 

 

1)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그 밭에는 각종 채소가 나기 전이고 그 땅에는 각종 초목이 있기 전이었다.

왜냐하면 야웨 하나님이 그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또 사람은 그 토지를 경작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성서는 하늘과 땅의 낳고 낳음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하늘과 땅은 사람을 비유한다. 낳고 낳음을 이야기하는 데 그 순서가 땅의 다시 낳음부터 언급한다.

땅이 다시 태어나면서 자연스레 하늘도 다시 태어난다. 

 

창세기 2장 5~ 6절은 다시 태어나야 할 땅에 대해서 기술한다.

창세기 2장 5절은 모든 인생들이 딛고 서 있는 마음의 상태를 말해주는 땅이다.

엘로힘을 찾고 또 찾더라도, 그 아래에서 무수한 지식과 교리를 잉태하고 또 추구하고 있더라도

인생은 한마디로 말하면 곧 2장 5~ 6절과 같다는 간결한 규정이다.

모든 인생이 처해있는 상태를 간단히 기술하고 있다.

몸과 마음, 마음과 몸은 둘이로되 둘이 아니다. 에레츠는 몸을 비유하고 샤데(들)는, 마음을 비유한다.

 

그 땅은 이러하다.

이 문장은 이렇다.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사람은 (아다마) 그 땅을(에트 하아다마)경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관사가 없는 아담이니 누구나 사람이 그러하다는 걸 이야기 한다.

 

아다마의 상태는 '여호와 하나님'의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

말하자면, 아직은 야웨 곧 '나는 나'라는 자각과 주체적 삶의 눈뜸이 없었다는 얘기다.

결국 '나는 나'라는 것을 향해 마음이 작동하지 않다는 얘기와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않았다는 얘기는 같은 말이다.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건,

처음 동물적 본능을 따라 지향하던 삶에서 돌이켜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겠다.

성찰이란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계기가 찾아와야 한다.

 

현재 삶의 위기(자아 위기)를 겪기 전에는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

'야웨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않았다'는 서술이 가능하다.

사람은 있으되 그 마음 땅을 경작하지 아니한다. 따라서 야웨 하나님의 비에 의해 경작되는

초목과 채소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성공신화만을 좇고 경쟁과 다툼과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살고있는 마음은 사막일뿐,

거기 야웨의 비가 내릴 여지가 찾아올 리 없다.

그 땅을 경작하지 않으니 초목도, 채소도 나지 않고 오로지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고 있다고 묘사한다.

 

이게 종의 상태로 사는 사람들의 실상이다. 마음을 경작하지 아니한다.

마음에 초목도 채소도 나지 않는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만 자옥하다.

모든 인생이 목매고 있는 것들도 따지고 보면 안개와 다를 게 무엇일까?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인생을 이렇게 간단하게 규정한다,

 

그리고 그 땅으로부터 안개가 올라와 그 온 땅의 표면을 적셨다.(창 2:5)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땅을 적시는 게 아니라, 땅에서 올라온 안개가 잠시 땅을 적시니 더욱 땅은

황폐할 뿐이라는 게 에덴의 시(詩)다. 사실은 이것이 '아다마'의 실상이다.

이 '아다마'로부터 새로운 땅을 낳겠다는 게 '땅이 낳고 낳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아다마'는 '아파르 아담(흙사람)의 토대요, 아파르 아담의 자궁인 셈이다.

 

야웨 엘로힘의 창조는 이렇게 계속된다.  

 

 

'하아담 아파르' (그 흙사람)

 

여기서 아파르는 '먼지' 혹은 '티끌' 혹은 '가루'를 의미한다.

아다마는 창세기 2장 5~6절의 마음 상태다.

야웨 하나님의 비가 내리고 땅이 다시 낳음을 입는다는 건, 아다마로부터(민 하아다마) 고운 흙의 가루를 빚어

마치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듯, 가루와 같은 마음 상태로 빚어감이다.

이를 일러 옛사람들은 야웨 하나님이 하아다마로부터 아파르 아담을 지었다고 이야기한다.

 

번역 성경들은 대개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고 번역한다. 오해가 깊다.

가장 많은 오역이 이 문장에서 발생한다.

한글성경들은 거의 오역하고 있다. 여기서 아파르는 사람을 만드는 재료로 생각하고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신화를 만든다. 그런 뜻이 아니다.

여기서 아파르와 아담은 히브리어 문장에서 동격이다.

따라서 아담은 곧 아파르 흙이다. 동격문장이다. 이 문장은 하아다마로부터 하아담 아파르를 빚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아다마가 2장 5~6절의 상태에 있는 우리들의 마음이라면,

2장 7절 흙사람이라는 건, 마치 아브라함을 자신을 일컬어 티끌과 재(아파르 베어페르)라고

고백(창 18: 27)하는 것과 같은 상태를 일컫는다.

욥도 새롭게 그의 길을 들어설 때 비슷한 고백을 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경멸하고 티끌(아파르)과 재(에페르)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 42: 5~6) 

 

다시 말하면 땅이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민하아다마로부터 마음이 흙가루처럼 된, 즉 '나는 티끌과 재와 같습니다.'와 같이 마음이 낮아진 상태를 일컫는다.

진토와 같은 존재임을 자각하는데서부터 비로소 마음 땅이 새로워진다는 것,

거기서부터 땅은 새로워지고 또한 새롭게 숨을 쉴 수 있다는 것, 이

해서 그 코에는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지는 것이고

거기서부터 사람이 새로워지니 혼은 그냥 혼이 아니고 산혼이 된다는 얘기다.

야웨 하나님을 향하여 서있는 '레네페쉬 하야'라고 하는 이야기다.

'~ 향하여 있는 네페쉬  하야.' 그러므로 여기서 하늘의 숨결로 숨을 쉬게 되니

하아다마로부터 아파르 아다마로 빚어지면서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숨으로 숨쉬게 되니

하늘의 거듭남이 아닌가? 그러므로 땅의 다시 낳음과 하늘의 다시 낳음, 곧 하늘과 땅의 계보가 시작된다.

 

하늘과 땅의 낳고 낳음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렇게 아담은 비로소 '처음 사람'이 된다. 따라서 성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처음 사람이란,

아다마로부터 다시 태어난,

그리고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으로 숨을 쉬기 시작한 존재를 처음 사람이라고 칭한다.

이는 성서의 이야기를 읽어가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창세기 2장 5~6절의 상태는 처음 사람을 낳기 위한 토대(성서의 논법으로는 동물)요, 기반이고 2장 7절이

'처음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제 처음 사람으로부터 성서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2) 하아레츠(the earth)와 하샤데(the field)와 하아다마(the ground)

    

에레츠가 포괄적으로 땅 전체를 일컫는다면, 샤데는 경작 가능한 들이요 밭을 의미한다.

이 밭은 동시에 들이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이곳은 코스모스, 곧 세상이기도 하다(마 13장 참조)

들은 채소와 곡물을 내기도 하지만,

들짐승이 들끓고 있는 곳이고 야생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다.

야생이란 동물의 왕국의 속성인 약육강식만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다.

하아다마는 경작의 대상이 되는 땅이지만 아직은 채소를 내거나 열매 맺는 나무를 내기 전의

'황무지'를 일컫는다. 황폐하고 강퍅한 땅을 상징한다.

원문은 하아레츠와 하샤데, 하아다마의 구분이 명확하다.

영어로는 earth와 field와 ground로 구분하고 있지만, 70인 역은 하아레츠와 하아다마를 그냥 '게스'

한 단어로 통일하고 있따.

하샤데(field)는 아그루라고 구분한다.

 

마음은 '아레츠'로 비유된다.

6절은 땅에서 안개만 올라와 지면을 적시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에서 지면은 하아다마의 표면이다.

한개만 올라오는 까닭은 야웨의 비가 내리지 않아서고 경작할 사람이 없어서다.

안개는 약육강식의 소산물로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이고, 앞을 가려 만물을 밝히 볼 수 없게 하는 것들이다.

이익의 관점에서만 타인을 바라보기 때문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한다.

그것이 눈을 가리는 비늘이다. 눈을 가리는 비늘이 안개다.

안개는 땅에서 올라온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아니다. 볕이 들면 사라지고 들은 여전히 메마르다.

 

그러나 이 땅은 단지 그러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야웨의 비가 내리면 경작할 땅으로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 야웨란 요드, 헤, 바브, 헤의 신성 네 글자요, 유대인에 의하면 감히 발음해 부를 수 없어서

'그 이름(하쉠)'이라고 바꿔 부르는 그 야웨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에 의해  엄위하신 신으로 일컫고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하는 오해한 야웨일 뿐이다. 

 

사실 야웨는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아로 그 이름이 확장된다.

여호수아는 '야웨는 구원이시다'는 의미다.

야웨는 '나는 나다' '내가 곧 그다'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이름이다.

예수 이름도 결국 야웨에서 유래하였다.

 

'하아다마'는 동물의 왕국의 강퍅한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다.

인생은 누구나 처음은 그렇게 살기 마련이다.

누구나 먼저 생존의 세계에서 생존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 마음은 생존 본능을 충족하는 방향으로 초기화되고 그렇게 설정된다.

따라서 이때 정신의 세계를 형성하는 형상은 야생동물과 다를 바 없다. 인면수심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 겉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마음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동물과 차이가 있다면 단지 아이큐가 조금 다를 뿐이다.

하여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의식과 마음의 세계가 동물의 형상으로 초기화되어 있던 것을

'사람의 형상'으로 다시 버전업 시켜 재설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곧 야웨(나는 나. I am)로 인해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고, 야웨 엘로힘의 비가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거기서 비로소 '동물의 형상'은 '사람의 형상'으로 다시 지음 받는(born again) 것이고

이를 '하나님의 형상(베찰메누 케드무테누, 우리의 형상 안에서 우리의 모양과 같이, 이마고데이)이라 성서는 칭한다.

 

더스트 아담은(아담 아파르 the man of the dust) 바로 이 하아다마로부터( 민 하아다마, from the Ground) 나온다.

하아다마가 더스트 아담을 낳는 것이다.

에덴 이야기는 땅이 땅을 낳는 계보 이야기다.

여기서 하아다마로부터 더스트 아담을 낳는 것을 바라나 아사를 사용하지 않고 '야차르(조성하다) 동사를

사용한다.

이로부터 낳고 낳고의 계보 곧 톨도트는

바라와 아사와 야차르의 동사 등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2장 4절에 창조와 관련하여 '바라' '아사'가 나오고 7절에서 '야차르'가 나오고 있다.

 

창세기 2장 4~ 6절은 이같이 인간의 실존을 진단하면서 에덴의 이야기를 전개한다.